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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마음으로 세상보기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전재천(암브로시오)|4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100세 시대라는 꿈같은 얘기가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100년의 긴 삶이 장밋빛 인생이 될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사람의 수명이 길어지는 만큼 현대인들에겐 죽음이라는 단어가 점점 생각하기 싫은 말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누군가 얘기했듯이 죽음이 죽어버린 시대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19세기 프랑스의 낭만파 시인들은 만나고 헤어질 때 ‘봉쥬르!(Bonjour!, 아침인사)’나 ‘봉수아르!(Bonsoir!, 밤인사)’같은 인사말 대신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라틴말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죽음을 기억하라!’ 혹은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뜻이다. 100세 시대를 구가하는 현대인들에겐 참으로 방정맞고 재수 없는 인사말이 아닐 수 없다.

깨지기 쉬운 유리병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닌다면 참으로 불안하고 조심스러울 것이다. 사실 우리 인간은 죽음이라는 유리병을 늘 달고 다닌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다. 그리고 이 유리병은 언제 깨질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 인간은 죽음이라는 유리병을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죽음이라는 것이 항상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음에도 그것이 우리에게는 영원히 다가오지 않을 것처럼 착각하고 죽음에 대한 무관심과 무감각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11월을 위령성월로 정하고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함과 동시에 우리의 죽음에 대해서도 묵상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기억하고 기도한다는 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아름답고 소중한 행위이다. 동물은 기억하고 기도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죽은 이들을 위해 바치는 기도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위령기도는 대단히 열심히 바치는 반면,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한 묵상은 소홀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죽음이 무엇이냐?’ 하는 식의 철학적인 논리를 풀어 보라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경험할 수 없고 경험했다면 이미 죽은 것이기에 죽음은 누구에게나 미지의 것일 뿐, 아무리 죽음을 논해 보아도 그 결론을 얻을 수는 없다. 따라서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떻게 죽느냐?’ 또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하는 윤리적이고 신앙적인 사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떻게 죽느냐?’ 하는 이 심각한 질문은 역설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의 질문이 된다. 그러므로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삶에 대한 질문이며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Memento mori! 어쩌면 이 말은 위령성월을 보내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오히려 축복과도 같은 값진 말이 아닐까! 우리가 기도하고 기억해주는 세상을 떠난 영혼들처럼, 우리 역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인식과 더불어 죽음을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참으로 소중하게 하자는 축복의 말이다. 또한 이 말은 현실에 대한 집착이나 탐욕을 절제하고 인생을 보다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는 고마운 채찍질이기도 하다. “깨어 있어라.”(마르 14,34)는 주님의 말씀처럼 지상의 삶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단 한 번의 기회뿐이라는 깊은 인식과 함께 우리 모두가 깨어 있으면서 깨어 준비할 때,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위한 기도도 그 만큼 더 아름답고 값진 기도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