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공동체 복음나누기 자료제공 : 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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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일 연중 제31주일 : 마르 12,28-34.
황은모(사도요한)|반야월성당 보좌신부
28율법 학자 한 사람이 이렇게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어가다 보면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야, 너는 엄마가 더 좋아? 아빠가 더 좋아?’ 그리고 학창 시절에 친구들 사이에서는 ‘야, 너는 쟤랑 더 친해? 아니면 나랑 더 친해?’라는 질문을 주고 받게 되기도 하지요. 또 더 나이를 먹고 연애를 하다 보면 연인들 사이에서는 이런 질문을 주고 받는다고 합니다. ‘자기야, 나 얼마만큼 사랑해?’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질문을 던지게 될 때가 있지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중에서 무엇이 더 우선되고 더 중요한 사랑일까, 하고 말입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모두 사랑에 대해서 순위나 등급, 혹은 그 정도를 알고자 하는 것들인데 사실 이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하게 되는 질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등급을 매길 수 있다거나 크기를 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순위나 그 정도를 자꾸만 매기게 되는 이유는 사랑의 출발점을 누군가를 향한 내면의 감정이나 말과 행동, 즉 외적으로 표현되는 행위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사랑은 누군가를 향한 감정이나 행위가 아니라 나 자신에서부터 출발을 해야 합니다. 참된 사랑은 나 자신을 버리고 또한 나를 죽여가는 노력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 자신을 희생하고 내어주고자 하는 ‘나’에 대한 스스로의 마음가짐과 자세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는 마음가짐에서부터 사랑의 출발점을 찾게 되면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상황과 대상, 그리고 모든 행위들이 놀라운 사랑의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향한 사랑의 내적인 감정이나 외적인 표현들은 사랑의 출발점이 아니라 나 자신을 비우고 희생함을 통해 얻게 되는 사랑의 결과물, 곧 결실이자 열매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저 온전한 사랑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참 사랑은 우선순위나 비교 대상도 없고 크고 작음도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언제나 완전하고 변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빠보다 엄마가 더 좋다니요! 이 친구는 많이 사랑하고 저 친구는 그보다 덜 사랑한다니요! 이는 이미 모순된 말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나 자신에서부터 사랑의 출발점을 찾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나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며 살겠다는 각오와 자신을 낮추면서 살고자 노력하는 겸손함이야말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 사랑의 출발점이 되어 줄 것입니다.
11월 11일 연중 제32주일 : 마르 12,38-44.
이수환(바오로 미키)|원평성당 보좌신부
38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 돈을 넣었다.
42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가난한 과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 안에서 예수님께서 율법학자와 가난한 과부를 어떻게 보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을 바라보는 그분의 말씀에서는 뭔가 모를 단호함이 묻어납니다. 그분이 그들의 행동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하면서 단죄 받을 것이란 표현을 써서 그런 것일까요? 아무튼 율법학자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은 불편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가난한 과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어떠합니까? 율법학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와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매우 좋아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분은 가난한 과부에게서 무엇을 보셨던 것일까요? 궁핍한 가운데서 가진 것(생활비) 모두를 다 넣은 그 마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과부가 넣은 돈은 생활에 필요한 돈입니다. 그러니까 먹고 살기 위해 꼭 필요한 돈입니다. 여윳돈, 문화생활하기 위한 돈, 그런 돈이 아닙니다. 삶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돈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귀중한 돈을 헌금함에 넣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보셨던 것이죠. 그럼 좀 더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생각해 볼까요?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내어놓는 그 가난한 과부의 마음은…
- 하느님을 정말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 앞으로의 삶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입니다.
- 인간 삶을 이어주는 건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마음입니다.
- 삶의 걱정 앞에 주저하지 않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용기있는 마음입니다.
- 자신의 삶 안에서 하느님께 최선을 다하는 마음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과부의 마음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좋으셨던 게 아니었을까요?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또 나의 마음은….
11월 18일 연중 제33주일, 평신도 주일 : 마르 13,24-32.
조재근(마르코)|월성성당 보좌신부
24“그 무렵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25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26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7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28“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29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30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31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2“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가족 중에 사이비 신흥종교로 넘어간 이가 있다면 가족들의 마음은 얼마나 힘들고 안타깝고 또 고통스럽겠습니까? 주일학교 교리교사까지 했던 교우가 ‘신천지교회’나 ‘하나님의 교회’로 넘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얼마 전에 가톨릭신문에서 기획특집으로 신흥종교를 다루면서 요즘 한국의 대표적인 사이비 신흥종교라고 할 수 있는 ‘신천지교회’에 대해서 상세히 소개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교회의 핵심적인 가르침임에도 이 씨(신천지교회의 창설자 이만희 씨)의 설교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요한묵시록의 실상이 신천지교회를 통해 이뤄짐으로써 신천지교회 신자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면서 요한묵시록의 내용을 강조했다.”(가톨릭신문, 2012년 9월 16일자 13면)
그리스도교에서 파생된 신흥종교의 특징 중에 하나는 ‘요한묵시록’을 비중있게 다룬다는 점입니다. 요한묵시록은 박해와 환난의 고통을 겪고 있는 신자들에게 보내는 하느님의 희망 가득한 말씀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는 구세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기쁨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묵시록은 믿는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1,3)
그러나 신흥종교에서는 무시무시한 종말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대목만을 부각시키고 왜곡해서 가르칩니다. “거룩한 독서를 위한 요한묵시록 주해”를 쓰신 정태현 신부님께서도 초기 교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단자들이나 사이비 종교가들이 요한묵시록의 내용을 본 맥락에서 벗어나 엉뚱하게 해석함으로써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때로는 파국으로 몰고 가기도 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이비 신흥종교의 특징은 종말을 유독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이상하게도 이 말씀만큼은 따르지 않습니다. 대신에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 명’이라는 숫자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들은 구원받는 사람 수를 144,000명으로 한정시킵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수가 이렇게 한정되어 있다면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실패라는 말입니까? 12×12×1,000=144,000입니다. 12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를 가리키고, 1,000은 하느님께 속한 숫자이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큰 숫자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144,000은 교회를 통하여 엄청나게 많은 무리가 하느님께 소속되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그 날까지 올바른 믿음으로 기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지면을 통해 ‘가톨릭, 희망의 이유를 답하다’라는 부제가 붙은 《나는 왜 믿는가?》(스코트 한 지음, 살림출판사, 2009)라는 책 한 권을 권해 드립니다.
11월 25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 요한 18,33-37.
고태권(그레고리오)|동천성당 보좌신부
33그리하여 빌라도가 다시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불러,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물었다.
34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하고 되물으셨다.
35“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하고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36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37빌라도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국가의 지도자를 뽑는 대선시기입니다. 지지하는 후보는 있으신지요? 대선시기를 보내는 이즈음 저는 지난 9월에 개봉했던 영화 “광해 : 왕이 된 남자”가 생각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군주의 덕(德)이란 과연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습니다. 여러분은 “군주-지도자”란 어떠한 덕을 지닌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오늘은 교회 전례력으로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왕이심을 고백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은 당시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로마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빌라도의 “당신이 이스라엘 임금인가?”라는 물음에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내가 왕이라고 네가 이야기 하고 있다.” 당신이 왕이심을 세속의 통치자에게 증언하십니다.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왕의 모습은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왕이신 예수님은 ‘백성을 위하는 분’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아니더라도 예수님의 삶은 백성을 위한 삶이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로 오신 그분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부정한 자라 무시당하던 나병환자, 과부, 창녀, 세리에서부터 돈 많고 권세 높은 부자와 지도자 모두를 하늘나라에 초대하신 백성을 위한 왕이셨습니다. 더하여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놓고 우리를 구원하는 당신의 백성을 위하는 왕이셨습니다.
둘째, 왕이신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가치는 ‘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가치는 힘이 센 자가 지배하는 주먹도,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천박한 자본주의도, 지식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약삭빠른 인간적 지식도 아니었습니다. 그분 삶과 가르침-가치-은 하느님 나라 선포였습니다. 동시에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행복, 온유, 의로움, 자비, 순결, 평화, 기쁨, 자유 속에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불변하지 않는 가치로써의 진리가 당신이 살아가신 가치였습니다. 그러하기에 당신 왕국의 통치 이념은 진리였으며 진리로 당신 백성을 부르시고 진리를 위해 당신을 희생하십니다. 그분은 진리 그 자체셨습니다.
끝으로, 왕이신 예수님은 ‘하느님 가치의 위대함’을 증언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분은 세상의 힘에 주눅들거나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지만 때로는 답하시고 때로는 질문하시는 모습 속에서 심문의 주도권을 예수님께서 쥐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힘과 사람들의 궤변에 말려들지 않으시고 왕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비록 겉모습은 초라할지라도 그 내면에는 왕의 힘과 권위가 느껴집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사제직, 예언직, 왕직을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우리가 꼭 ‘왕’이 아니더라도, 한 공동체를 이끄는 ‘리더-지도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왕직에 참여하는 고귀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역시 왕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군주의 덕’이란, ‘리더란 어떠해야 할까?’라는 질문은 나와 상관없는 어떤 피상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곧 나의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왕직에 참여하는 우리에게 “백성-이웃-을 위한 삶”, “진리를 위한 삶”, “하느님 가치의 위대함”의 모습으로 살아가라고 답을 보여주십니다. 저도 이곳 동천성당에서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모습대로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함께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스도왕을 모시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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