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3년 31세의 나이에 한국으로 와서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평생 헌신해 온 엘레른캄프 잉게보그(Ellernkamp Ingeborg, 한국이름 옥잉애) 여사가 2012년 한국 입국 50주년 및 팔순을 맞았다 이번 달 ‘만나고 싶었습니다’에서는 우리나라의 아동복지를 위해 애쓴 옥잉애 여사를 만나 그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독일 출신으로 5남매 중 첫째인 옥잉애 여사는 어려서부터 어린이들을 좋아했고 동생들도 잘 돌보는 성품이었다. 그런 그녀가 결혼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회봉사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것은 18세 때의 일. 보육교사로 6년여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가 대학에 진학하여 보육학을 전공한 옥잉애 여사는 조기졸업을 한 뒤 프랑스 루르드로 가서 전세계 젊은이들과 함께 신앙공동체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자신보다 먼저 한국으로 갔던 오스트리아 친구(하 마리아)로부터 한국에 해야 할 일이 많고 특히 어린아이들을 위해 일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편지를 받고 곧장 한국행을 결정하게 되었다.

당시 대구대교구장 서정길(요한) 대주교의 정식 초청으로 1963년 4월 1일 한국 대구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옥잉애 여사는 “구두닦이 소년들이 자립을 위해 일하며 머물던 삼덕성당 부근의 근로청소년의 집에서 루이스, 프란체스카, 친구 하 마리아와 함께 머물면서 한국말도 배우고 한국생활도 배웠다.”고 회고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아내를 떠나보낸 택시기사가 네 살 된 어린 아들을 매일 택시에 태우고 다니며 운전하는 것을 알고는 어린이보호소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에 옥잉애 여사는 서 대주교를 찾아가 그 뜻을 밝혔지만 당시 교구의 어려운 재정여건상 도움을 받을 상황이 안 되어 대구시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대구시장을 찾아갔다. 마침 시에서는 시립탁아소 한 곳을 운영하고 있던 터라 대구시장은 옥잉애 여사의 뜻을 받아들였고, ‘시 소유의 땅을 빌려주는 대신 1년 후에 갚아달라.’는 조건을 붙였다.
무상으로 땅을 빌리게 된 옥잉애 여사는 “그때 ‘부주교님’이라 불리던 이명우(야고보) 몬시뇰의 도움으로 대구시내 여러 곳의 땅을 보러 다녔는데, 마지막으로 결정된 곳이 대명시장 뒤의 땅이었고 그곳이 첫 번째 어린이집의 탄생 장소가 되었다.”고 했다. “빈 땅을 얻긴 했지만 돈이 없었으므로 독일에 있는 친구, 지인, 친구의 친구 등 많은 이들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 당시 40만 원이라는 큰돈이 모이자 비로소 집을 짓기 시작했다.”는 옥여사는 “어린아이 방 1칸, 어른들이 살 방 1칸 이렇게 2칸을 짓고 1965년 5월 5일 30명의 원아들을 받아 무상으로 돌보아주는 ‘가톨릭 소화보유원(小花保幼院)’을 열었다.”고 했다. 원아선정은 일 나가는 한 부모 자녀 중에 하루종일 혼자 지내야 하는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가장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을 우선으로 했다.
30명 정원에 100명이 넘게 찾아온 아이들을 다 받지 못해 마음이 아팠던 옥잉애 여사는 “계속 독일에 편지를 띄워 독일에서 보내오는 돈이 모일때마다 방을 1칸씩 늘려가면서 아이들 옷 역시 원조로 받아입혔고, 미국에서 보내오는 옥수수가루, 밀가루, 분유, 통조림고기, 기름으로 몇 년 동안 아이들의 식생활을 돌볼 수 있었다.”고 했다. 또 닭 300마리, 돼지 10마리를 키워 돼지 1마리씩 팔아 교사월급을 주는 등 생활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
원장으로서 어린아이들을 위한 교육을 잘 하고 싶었던 옥잉애 여사는 “어린아이 키우는 방법은 알지만 문화가 다른 한국의 어린아이 키우는 방법을 몰라서 인근 계명대학을 졸업한 유능한 유아교사 박현수 씨를 초빙하여 유아교육의 기틀을 잡았고, 아이들의 식사준비와 살림은 북에서 혼자 피난내려온 박옥순(수산나) 자매 덕분에 30년 동안 걱정없이 지낼 수 있었다.”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뒤 가톨릭 소화보유원은 가톨릭 소화어린이집, 가톨릭 새마을유아원, 가톨릭 소화어린이집으로 여러 차례 명칭이 바뀌었고, 점차 어린아이들이 많아지자 분원을 개원(1971)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1989년 여러 가지 주변 여건상 대명동의 첫 번째 어린이집을 처분하고 상인동으로 옮겨 상인동 가톨릭 소화어린이집을 개원하였다. 2000년 어린이집의 원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옥잉애 여사의 손길을 거쳐 간 아이들만 해도 3500여 명으로, 현재 대명동과 상인동의 가톨릭 소화어린이집은 저소득층과 맞벌이 부부 자녀들을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다.
어린아이들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어린아이의 눈높이에서 어린아이들을 돌보면서 특히 아동복지에 힘써온 옥잉애 여사는 유아교사들에 대한 전문성 교육과 상호정보교환의 필요성을 느껴 1980년 한국가톨릭아동복지협의회 창립에 기여하였고 1989년부터 7년간 회장을 역임하였다. 협의회장 시절 옥잉애 여사는 “가톨릭 시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가톨릭 교육이 더욱 필요하다고 느껴 독일 가톨릭아동복지협의회와 협력계약을 맺고 지속적으로 독일의 아동시설을 둘러보는 연수를 실시해왔다.”고 들려줬다. 또 “해마다 독일 카리타스회 상황중심의 아동교육(아동상황중심교육) 전문강사를 초빙하여 아동을 위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과 교사재교육을 실시해오고 있는데, 독일 카리타스회 구너 신부님은 매년 오셔서 강의를 해주신다.”며 “은퇴를 한 뒤에도 이런 교육이 잘 진행되고 있어 대단히 기쁘다.”고 말했다.
한국으로의 이끄심이 하느님의 은총이고 축복이라는 옥잉애 여사는 “그동안 하느님으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았고 보람있게 살 수 있어 감사하고 또 많은 분들께 은혜를 입었다.”며 “이젠 대구가 고향”이라고 했다. 평화로운 마음으로 노년의 삶을 살며 유학을 준비하는 대학생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치고 소공동체 모임도 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옥잉애 여사. 그녀는 “모든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작은 것 하나라도 기쁘게 받아들이고, 이웃과 나누며 이웃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산다면 그 이상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며 “한국의 모든 어린이들이 기쁘고 자유롭고 올바르게 잘 자랄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면 좋겠다.”며 어린아이처럼 함빡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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