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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학교에 오신 예수님


박경선(안젤라)|대곡성당, 수필가

 하늘이 유난히 눈부신 날, 형색 초라한 할머니가 교장실로 찾아오셨다.
“교장인교? 우리 아이 여섯이 모두 이 대성핵교를 졸업했제.”
87세 할머니는 찻잔을 뒤로 물리며 살아온 이야기를 하셨다. 자식들 잘 키워 출가시키고 지금은 학교 근처에서 혼자 사신단다. 막내가 1학년 입학하던 해에 남편이 돌아가셨고 서문시장 난전에서 안 해본 장사가 없단다. 서문시장에서 칠성시장까지 차비 아끼느라 걸어 다니며 점심은 아예 굶고 살았단다. 할머니는 시커먼 비닐봉지를 풀어 돈 봉투 12개를 꺼내셨다. 백만 원씩 들었다고 했다. 봉투들이 누렇다. 오래 모아온 돈, 자기 아이들처럼 가정형편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써달란다. 그 연세에 건강 지키려면 돈이 필요하실 텐데 조금만 주고 되가져 가시라 해도 완고하시다. 고생고생해서 모은,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일천이백만 원!

‘그래, 장학금으로 쓰자!’
이 학교 교장으로 초빙되어 오면서부터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 이 분이 먼저 하시겠단다. 신문에도 내고 감사패라도 만들어 드리려 하니 일체 비밀로 해달란다.
“그럼, 할머니 이름으로 장학회를 만들어 결손가정 아이들에게 주고 감사편지 드릴게요.”
“내 이름자 넣으면 안 돼. 우리 아들들이 알면 잘 살면서도 저네들 달라고 극성 부릴겨. 그라고, 난 글씨도 몰러. 가끔가다 혼자 사는 노인한테 안부 전화나 한 번씩 해줘. 교장이 아이들한테 잘 한다고 소문 듣고 왔어.”

아마 등교시간에 교장이 교문에서 아이들과 하이파이브하며 맞이하는 걸 두고 그러시리라. 하지만 할머니 옆에 나를 가지런히 세워보니 참으로 부끄럽다. 할머니의 비밀 돈 일천이백만 원! 우연의 일치일까? 그 금액은 하느님이 나를 도구로 삼아 성전 건립 기금으로 주신 액수와 일치한다. ‘김대건’ 책 인세를 일시불로 받은 삼백만 원과 다른 책 너댓 권 인세 받아 하느님께 드려놓고 연말에 세금 혜택 받으려고 기부금 영수증까지 받았으니….

게다가, 하느님이 도구로 쓰며 주신 인세와 강의료로 전교생에게 생일선물 책을 사주며, 강의 다니는 학교마다 책 사 보내고, 어려운 제자 도우며, 제단체에 기부하며 내 돈인 양 생색내었음에 할머니 형상으로 오신 예수께서 이르셨다. “나를 보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지 않느냐!”

어제만 해도 다른 학교 학부모 연수 강의하러 가서 운전면허증 사진 밑에 박힌 장기기증 사과를 들어 보이며 남들을 가르치려 들었다.
“카네기 같은 사람도 나누고 베풀기를 즐겨 해서 오래 살았다지요? 저는 제가 가진 것이 이것밖에 없어 장기기증을 약속했어요. 어릴 때부터 조금씩 나누며 사는 일에 관심을 가지도록 이끌어 주어야….”

할머니 형상으로 오신 예수님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예수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외롭고 외로워서 흐느끼셨다. 내 영혼이 불쌍해서 흐느끼셨다. 그 흐느낌 말이 되어 내 가슴에 못 박혔다. “내 못자국에서 흘러내린 피가 진실되게 네 가슴을 따스하게 하지 못하였던고?”
기댈 어깨 없는 내 둘레 사람들에게 좀 더 숨죽여 다가가야 할 내가 예수님 어깨에 기대어 흐느꼈다. 못 박히며 내어 놓은 길, 그 길을 묵상하며 성탄절을 맞아야겠다.

 * 박경선 님은 수필가로 활동하면서 현재 대구 대성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