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의 연속이다. 6일은 직장으로, 주일은 성당으로 향한다. 때론 친구들과 어울려 즐기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신념처럼 내 몸을 칭칭 동여매고 있다. 습관처럼 반복된 주일 지키기는 줄잡아 50년을 훌쩍 넘겼으니 깰 수 없는 틀과 같다.
미사 때마다 잘못을 뉘우치며 신부님 강론말씀처럼 살아야겠다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지곤 한다. 하지만 악마의 유혹인지 마음은 콩밭으로 떠나버린다. 복음말씀이 한 구절도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다. 함부로 십자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것 같아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만 신앙의 깊이가 이 정도인가 싶어 허탈할 때가 있다.
“이웃을 사랑하라, 용서하고 나눔을 실천하라.”는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성체 앞에서는 실천을 다짐했지만 성당 문을 나서면 잊고 만다. 베풀기보다 누리는 것에 더 익숙해진 탓이리라.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하는 행위를 반성하며 성체 앞에 무릎을 꿇는다. 당신의 말씀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이것조차 습관이 될까 두렵기도 하다.
신앙인들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 사랑, 행복, 생명, 기도, 나눔이라는 발표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여기에 겸손한 마음을 덧붙여 본다. 겸손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서로의 마음을 이어준다. 겸손하지 않으면 자신도 타자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 날마다 많은 민원인들이 내 방을 찾는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더 낮은 자세로 듣겠노라 다짐하지만 얼굴이 일그러질 때도 있다. 곧 후회하지만 고쳐지지 않는다. 겸손을 청하는 기도를 드릴 때마다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은 그래도 웃으실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참된 신앙인 한 분이 있다. 건장한 신체와 인물은 연예인을 뺨칠 정도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술 중독으로 방탕한 생활을 했었다. 근무 중에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수전증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낮부터 갈 지(之)자 걸음에 별명도 ‘술주정’이었다. 그런 그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단주를 실행에 옮겼다. 주님의 부르심에 “예.”하고 그물을 버리고 따라나선 성 안드레아 사도와 흡사하다. 날마다 새벽 4시면 깨어 기도하고 매일 미사에 참례하며 지금은 직장과 교회 안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 나는 그를 삶의 모델로 삼았지만 흉내조차 내지 못한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몇몇 병원에서 내린 암이라는 진단에 모두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도 어머니는 기도의 끈을 놓지 않으셨고, 삶의 중심에는 항상 기도가 자리잡고 있었다. 수술을 앞두고 기적이 일어났다. 암 덩어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독실한 신앙심으로 사신 어머니의 묵주기도를 주님께서 들어 주신 것이다. 어머니를 닮으려 하지만 아직도 태부족이다.
퇴직 후에는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기로 다짐했다. 이미 농촌 마을은 노인들 차지다. 병마와 싸우며 외로움에 지쳐 있는 노인들의 벗이 되고 싶다. 유엔은 60세부터 장년이라 발표했다. 이 장년기만큼은 열정을 다해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리라. 마음이 시린 이들을 보듬으며 이웃에 신앙의 향기를 전하고 싶다. 주님께서 활짝 웃으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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