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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정 선생의 교실이야기 2
내 아이에게 가정은 { }이다


이유정(데레사)|계산성당, 대구가톨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무학고등학교

 사방이 눈으로 가득했던 이번 성탄절 고요한 밤에도 가장 높은 이로 계시면서 가장 낮은 자리로 오신 우리 아기 예수님은 보잘 것 없이 초라한 말구유 속에서도 여전히 환한 미소를 띠시며 평안히 계셨습니다. 아마도 그 곁엔 자신을 목숨으로 지켜주는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이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탄자정미사를 드리던 중 중년의 아저씨 한 분이 반백의 어머니를 업고 성체를 모시러 나가는 모습을 보며 신은 참 공평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기 땐 부모가 품에 안고 있어 줌으로써 어떤 눈보라도, 누추함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나이가 들어 쇠약해지고 정신이 혼미해져도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자식이 있으면 이 또한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는 까닭입니다. 그 옛날에 자신이 무수히 업어서 키운 아들의 등에 업혀 주님께로 나아가시던 그 할머니는 참으로 복된 삶이라 생각했습니다.

학기 초 선생님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쁩니다. 특히 담임을 맡은 교사들은 3월이면 반 아이들과의 상담을 하느라 더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야 합니다. 정규 근무 시간으로는 학생들과 상담할 시간을 제대로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담임교사들은 늦은 밤까지 시간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3학년 담임이었던 저 또한 2월 말부터 반 아이들과 개별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3월을 준비하였습니다. 우리 학교 3학년은 봄 방학 기간인 2월부터 매일 학교에 등교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반 학생 한 명이 등교를 하지 않아 연락을 해 봤지만 전화 연결도 되지 않았습니다. 반 아이들에게 그 학생에 대해 물었더니 “그 앤 학교 잘 안 오는데요.”, “아마 자고 있을 걸요.”, “이제까지 야간자습도 거의 한 적 없어요.”라는 대답만 돌아왔습니다.

아이들은 앞 다투어 말들을 쏟아 놓았습니다. 전 ‘농땡이 한 명이 또 우리 반에 들어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초반부터 이 녀석을 휘어잡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계속 전화하고 문자를 보내니 밤 9시 경이 되어서야 연락이 왔습니다.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눈 후 다음날 반드시 학교에 온다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그 학생은 오지 않았고, 전 다시 전날처럼 전화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통화가 된 저는 지금 당장 교무실로 오라고 말했습니다. “니가 오지 않으면 난 안 간다.” 저의 단호함에 그 아이는 결국 그 밤에 학교에 왔습니다.

덥수룩한 머리에 쭈뼛쭈뼛 교무실 문을 들어서는 아이를 보는 순간 안쓰러운 맘이 먼저 들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듣기로 했습니다. 첫 마디부터 가슴이 아렸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이혼한 부모님과 헤어져 부모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 후 조부모와 함께 살았던 이 학생은 몇 년 전엔 할아버지까지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무허가 집인 줄도 모르고 구입한 집에서, 심한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돌보며 힘겹게 살아가는 소년 가장이었습니다. 추운 날씨에 많이 아프신 할머니를 위해 직접 죽을 끓여야 했고, 병원에 모시고 다녀야만 하는 이 아이에게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기엔 처한 현실이 그 어떤 어른보다도 고통스럽고 외로웠던 것입니다.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느냐는 제 말에 “어머니, 아버지께도 인생이 있으시니 그러실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전 원망 안 해요.”라며 대견스럽게 답했습니다. 그러나 연이어 내뱉은 아이의 말에 저는 끝내 눈물을 참을 수가 없어 손을 맞잡고 그만 같이 울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밤에 자리에 누우면 그냥 막 눈물이 나요. 그래서 잠을 잘 못 자요.”라며 흐느끼던 그 아인 너무나 부모의 사랑이 고픈, 자신이 힘들 때 기댈 울타리가 필요한 열여덟의 외로운 소년이었습니다.

그날 저에겐 오랫동안 지켜줘야 할 아들이 또 한 명 생겼습니다. 우리 둘은 서로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습니다. 저는 엄마하고 자기는 아들해서 열심히 잘 살고 힘들 땐 기대며, 오랜 시간이 지나도 꼭 만나는 사이가 되자고…. 그 뒤 그 아이는 야간자습도 열심히 했고, 피우던 담배도 끊어 교장선생님께 금연상도 받고 성적도 올려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글을 쓰다가 전화를 했습니다. “아들, 너 이야기로 글을 쓰려고 하는데 괜찮겠나?”라고 물었더니 우리 아들이 “에이, 괜찮아요. 선생님은 엄만데.”라며 흔쾌히 답해줬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서 3장에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 혹독한 시련 속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이 인류 구원의 예수 그리스도로 사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성가정의 울타리가 튼튼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잘 묶어 튼튼한 울타리를 마련해 주님의 선물을 고스란히 잘 지켜준 요셉 성인과 성모 마리아의 희생적 삶이 빛나는 성가정만이 그리스도교적 삶이 많이 해제되어가는 이 시대의 또 다른 희망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교사들끼리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문제 아이는 없다. 문제 부모가 있을 뿐이지!” 물론 모두에게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를 일으키는 많은 학생들이 부모의 왜곡된 사랑법이나 사랑의 결핍이 원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으로 인한 부모의 다툼이 아니라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는 부모의 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 학교 도서관 자리에 “엄마가 운다.”라는 문구를 적어 놓고 매일 자신을 지키는 어떤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엄마에게 미안해서 공부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어머니는 마음이 아파서 또 우셨습니다. “내 아이에게 가정은  {         }이다.” 이 글을 덮으시며 네모 칸 속에 우리 아이는 뭐라고 쓸지 한 번쯤 생각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콜로 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