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열린 마음으로 세상보기
우리 안의 말을 신앙의 말씀으로 바꾸자


하성호(사도요한)|주교대리 신부, 1대리구장

어느 토요일 오후에 중늙은이들이 산을 내려오면서 큰소리로 내뱉는 말이 너무나 귀에 거슬렸다. “xx 대구에는 묵고 살 것이 있어야지!” 말끝마다 욕설이 들어갔다. 그날따라 그분들의 인격이 너무나 천박하게 여겨졌다. 우리 교우들은 그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어느 본당에서 강의할 때 그 욕설 섞인 대화를 흉내 내었다. 그랬더니 한 형제가 옆 형제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왜 그랬을까?

신앙을 제대로 생활화하기 위해 우선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 언어가 세속의 온갖 때가 덕지덕지 붙어있거나 저속한 것들이 아닌지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말은 자신의 사상을 담아내고 있고, 사상은 신념을 이루고 있으며, 신념은 자신의 인격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은 자신의 인격을 드러낸다. 그래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말을 점검한다는 것은 우리의 사상과 신념을 점검한다는 의미와 같다 하겠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 왜 그럴까? “믿다.”라는 라틴어 단어가 credere인데 이 단어는 cor(마음)와  dare(주다)가 결합된 합성어이다. “믿다.”는 곧 “마음을 주다.”이다. 결국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라는 것은 올바른 믿음은 올바른 말씀에 마음을 주는 것(들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말씀을 들어야 할까?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신앙의 해’를 선포하시면서 교황님이 발표하신 자의교서 『믿음의 문』의 다음 내용에 몇 번이나 밑줄을 그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이 사회생활의 자명한 전제라고 여기면서도, 사회적·문화적·정치적으로 자기 일의 결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가 흔합니다. 실제로 이 전제를 더 이상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 뿐더러 종종 공공연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2항)

안타깝게도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데에로 이끌리는 삶이 아니라 세속에 이끌리는 삶이라고 하여야 정직할 것이다. 남들보다 재물도 많이 가져야 하고, 쾌락도 많이 가져야 하고, 지배(명예, 권력)도 많이 가져야 행복하다는 세속의 말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면 너무 과한 말일까? 우리를 움직이는 우리 안의 말들은 재물과 쾌락과 지배에 관한 욕망들이 만들어내는 생각과 말들이 대부분이라고 해야 정직하지 않을까?


 
 

‘신앙의 해’를 보내며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우리 안의 세속 말들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바꾸어 우리의 인생여정을 신앙여정으로 바꾸어야 하겠다. 그렇지 않고서 “신앙의 여정을 재발견”(『믿음의 문』 2항) 하자고 호소하시는 교황님의 원의가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겠는가? 우선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세속 말들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바꾸는 작업부터 실천하기 위하여 다음 세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① 텔레비전 시청시간을 대폭 줄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자. 저속한 상업주의가 텔레비전을 비롯한 발달된 매체들을 이용하여 우리의 생각과 언어를 얼마만큼 저속하게 지배하는지를 살펴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② 세속적인 모임과 오락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평일미사에 열심히 참여하자. 많은 세속적인 모임과 오락들은 우리의 건전한 신앙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다. ③ 우리가 주님과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기자. 교회의 직무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원에서 비롯되는 소중한 직무이다. 교회의 직무에 충실한 이들이 성화되는 것은 그들의 생각과 언어가 신앙의 생각과 언어로 바뀌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여정을 기필코 신앙여정으로 바꾸어야 한다. 우리를 통하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강생의 신비가 지금 여기에 여전히 이루어지도록 주님 말씀 중심으로 돌아가자. 주님께서는 우리의 바람을 결코 헛되이 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