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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서로 치유, 나눌 때


김정실(벨라뎃다)|수성성당

계사년 새해다. 눈이 자주 꽤 많이 내린다는 것 이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눈 때문인지 모든 것이 꽁꽁 얼어 있다. 매서운 바람이 분다. 사람은 사람과 부대끼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인데 그 근원이 없어진 것 같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의 마음에 냉랭함을 느낀다. 모두들 허허 벌판에 서서 허둥대고 있는 느낌이 든다. 아니 바로 내가. 나는 허허로운 마음을 다잡기 위해 열심히 다녔지만 돌아오는 것은 텅 빈 마음뿐이다.

나는 그 허허로움을 갖고 혁명의 고전인 프랑스 혁명인 1832년 6월 항쟁, ‘비참한 사람들(레미제라블, Les Miserables)’ 이야기에 흠뻑 빠져 들었다. ‘비참한 사람들’은 19세기 초 프랑스의 가장 밑바닥 빈민의 삶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너무나 보잘 것이 없다. ‘장발 장’은 왜 전과자가 되었고 도망자로 취급되었는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의(衣), 식(食), 주(住)가 충족되지 않는 사회는 어느 쪽 누구에게 잘못이 더 클까. ‘팡틴’은 누구 때문에 미혼모가 되었고 또 창녀로 전락하게 되었나. 정말 ‘가르로스’는 도시의 부랑아인가. 그는 어렵고 힘든 모든 사람들을 보살피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이이다. 또한 불의에 항거해 가면서도 꿈과 희망, 웃음을 잃지 않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힘을 준다. 이 아이에게 거리의 부랑아라고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코제트’를 키워주는 ‘하나드로’ 부인은 정말 악마 같은 존재일까. 아니면 경제적 궁핍과 각종 편견과 낙인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가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닐까. 마찬가지로 ‘마리우스’와 ‘에피닌’은? 그리고 ‘자베르’ 형사는 또 어떻게 보아야 할까.

‘비참한 사람들’은 아름다운 영화이면서도 슬픔을 안겨준다.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르겠지만 나는 한 장면 한 장면에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었다. 사람답게 살기를 바라면서 더 나은 세상, 더 밝은 미래를 꿈꾸던 사람들이 힘 있는 자(者)들 앞에서 맥없이 죽어갈 때는 정말 마음이 아팠다. 더욱이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그 아픔에 함께 눈물 흘릴 줄 아는 따뜻한 사람들이기에 더욱더 마음을 울렸다. 그들은 그 비참한 생활 속에서도 하느님의 자비가 그들에게 늘 있음을 감사하면서 서로를 치유했다. 그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나눔이 없었다면 새 역사, 새 시대를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 세기를 훨씬 넘은 삶의 시대가 지금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빈(貧)과 부(富)는 어쩔 수 없는 극과 극인가. 21세기에서 우리는 가장 풍요롭게 많은 것들을 누리면서 생활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같은 시대 안에서도 우리가 생각도 할 수도 없을 만큼 큰 빈곤과 기아, 질병 등의 고통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 지금 너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비와 사랑의 실천이다. ‘말(言語)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를 기억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것이 세끼의 밥을 꼭 먹지 않아도 된다. 아니 세끼를 다 찾아 먹더라도 조금 작게 먹는 것이 건강에 좋을 뿐 아니라 굳이 다이어트와 줄다리기를 할 필요도 없다. 나눔은 자비이며 사랑이다. 작은 나눔이 모여서 따뜻함을 만들고 다시 넉넉함을 만들어 낸다. 이 따뜻함과 넉넉함이 더욱 더 커질 때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것이다.

‘비참한 사람들’ 시대의 하느님과 지금 현실의 하느님은 같으시다. 베푸시는 것도 언제나 같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께 받은 만큼 나눔의 실천을 말(言語)이 아닌 행동으로 해야 한다.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바람은 매서운데 마음의 허허로움이 가셔짐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