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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마음으로 세상보기
현대사회와 교회


정인용(바르톨로메오)|제3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배경
공의회는 교회나 신앙에 큰 문제가 있을 때 열렸던 교회 전체회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창기의 공의회가 신앙 조목으로 개최되었다면, 16세기 중반에 있었던 트리엔트 공의회는 종교분열의 문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사회가 문제가 되어 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과학과 기술의 눈부신 발달입니다. 이것은 산업화를 일으켜 우리의 삶에 물질적인 풍요와 편리함과 시간적인 여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또한 대중(大衆)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의식을 일깨워 민주화와 자유주의와 평등주의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한편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우리 인간의 업적(業績)임에도 우리 스스로가 그것에 놀라고 경탄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미래의 세계에서는 과학과 기술로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성취임에도 자연과 하느님의 영역을 혼동하는 사람들은 마치 하느님의 영역을 정복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자체가 대부분 물질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집착한 물질주의(배금주의, 拜金主義)와 과학만능주의를 일으키고 현대사회에서 볼 수 있는 무신론이라는 대규모 현상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현대인들은 과학적인 사고(思考)와 함께 실증(實證)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과학적으로 똑똑해졌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처지(處地)
이러한 현대사회의 특징은 우리의 신앙에도 영향을 미쳐 많은 냉담자가 생겨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신앙에 대한 무관심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 교회로서는 하나의 위기(危機)가 닥쳐온 것입니다. 물론 아직까지 우리 한국 교회는 다행스럽게 교세가 증가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지만 전교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예비신자의 수가 줄어드는 것이 현실화 되어 갑니다. 반면에 신자들의 신앙의식을 일깨워 예전의 수동적인 신앙생활 형태가 반성적이며, 의식적이고 능동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대응(Aggiornamento)

무신론 현상과 수많은 사이비들이 생겨나는 세상에서 교회는 자신과 자신의 신앙을 다시 정비(整備)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께 거는 희망입니다. 무엇이 하느님께 대한 참 신앙인가를 묻고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위 ‘신앙의 원천에로의 회귀(回歸)’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평신도들의 사도직 의식과 위치 향상, 그로 인한 평신도 참여의 신앙운동(예 : 레지오마리애, 꾸르실료, M.B.W 등), 성경운동, 전례개혁, 교회가 자신과 세상에 무엇이냐는 의식의 쇄신, 교회 일치운동, 신앙의 진리에 대한 새로운 해설(새롭게 출간된 가톨릭교회교리서), 소공동체운동 등이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런 움직임을 전·후해서, 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열렸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변화되기 위한 수많은 회의들이 열렸습니다. 우리 교구도 십여 년 전에 ‘제1차 교구 시노드’, 그리고 지난해에 폐막된 ‘제2차 교구 시노드’라는 큰 회의가 있었고, 그 후속회의로 많은 회의들이 지금도 열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진지한 신앙 성찰(省察)을 나타내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운동의 장본인입니다.
예전에는 세상 현실과 희망이 하느님께 거는 희망(신앙)과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구분하고 새롭게 융합(融合)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회제도뿐만 아니라 과학과 기술을 신앙 안에 끌어들여 하느님 안에서 그것이 갖는 참된 뜻을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자연과 인간의 업적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너그럽게 허락해 주신 선물이며 능력입니다.
 

위기를 기회로
신앙이 자신을 돌아보고 이 세상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찾는 각성(覺性)을 통해서 마침내 교회는 자신과 이웃(세상)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또한 세상의 일에도 더 큰 책임을 지운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의(衣), 식(食), 주(住)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못한다.’(마태 4장 4절) 아무리 잘 만든 사회법과 제도도 결국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살며, 인간의 삶에는 사랑과 보람과 의의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없으면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요해도 더 이상 살 수 없는 처지에 이를 수 있음을 누가 모르겠습니까.(예 : 왕따) 우리 개개인도 그렇습니다만, 인류 전체를 보더라도 하느님의 사랑과 말씀 없이는 광활한 우주에 버려진 고아(孤兒)와 같이 외롭게 고통 속에 죽어가야 할 처지 밖에는 안됩니다. 그러기에 현대의 사람들은 겉으로는 세상의 것에서 만족을 찾지만 내면으로는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더 더욱 갈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과연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을 위한 하느님의 기쁜 소식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온 세상으로 가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시오.’ 우리의 사명을 다시금 성찰하고 실행하기 위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렸고, 우리가 그 공의회를 사는 주인공입니다. 우리 교구의 제2차 시노드 주제도 ‘새 시대 새 복음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