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이 달의 말씀살이 - 소공동체를 위하여
이 달의 말씀살이
- 소공동체를 위하여


교구 성서사도직과 고태권, 황은모, 김요한, 이수환 신부

· 소공동체 복음나누기 자료제공 : 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053) 250-3082 cafe. daum.net/biap

 

 

 

6월 2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 루카 9,11ㄴ-17.

11그러나 군중은 그것을 알고 예수님을 따라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12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13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사실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15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16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17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 예수님 초대

어느 분이 짧은 말로 예수님을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주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의 눈을 여시어 주님의 길을 보게 하시고, 저희의 귀를 여시어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아멘.”)

 

● 말씀 읽기

어느 분이 루카복음 9장 11절~17절을 큰 소리로 천천히 읽어주십시오.

 

● 세밀한 독서

다음의 사항들을 살펴보며 본문의 말씀을 각자 천천히 읽겠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온 군중들에게 어떻게 해주십니까?(11절)

-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각자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도록 군중을 돌려보내자고 제안하는 열두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13절)

-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양식은 얼마나 되나요?(13절)

- 군중들과 제자들이 모두 자리를 잡은 후 예수님의 행동을 살펴봅시다.(16절)

-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얼마나 되었나요?(17절)

복음말씀을 누가 한 번 더 천천히 읽어주십시오.

 

● 새겨 듣기

잠시 침묵 가운데 복음을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을 곰곰이 새기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집시다.(3~5분)

 

● 나누기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짧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실천하기

지난주 결심하고 실천했던 것을 나누어 봅시다.

옆에 있는 이웃의 어려움을 보고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며,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고 내버려 두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돌아보도록 합시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부족함은 풍성히 채워 주시리라 생각하며 작은 도움이라도 어려운 이웃에게 베풀어보도록 합시다.

 

● 청원기도

우리 반공동체, 본당공동체, 지역공동체, 우리나라, 지구촌공동체에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시간입니다.

 

● 마침기도

마침성가는 가톨릭 성가 174번을 부르겠습니다.

* 위 성가는 예시 자료입니다. 자유롭게 성가를 고르셔도 됩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복음묵상 (루카 9,11ㄴ-17.)

사공병도(베드로)|동촌성당 보좌신부 

옛 격언에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해서 ‘뭐 저런 것도 격언이냐?’며 싱겁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가만히 곱씹어 보면 참으로 옳은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만을 줄 수 있으니 말이지요. 그래서 만약 누군가가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주겠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허풍쟁이 또는 어리석거나 비상식적인 사람으로 치부하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건네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가진 것이라고는 고작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인데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비상식적인 요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시기라도 하듯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차고 넘치게 먹이십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성체성사 역시 상식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살과 피를 먹으라니요? 조그만 밀떡과 시큼한 포도주더러 하느님의 몸과 피라니요?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결코 내뱉을 수 없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리 하셨습니다. 자신에게서 생명의 말씀을 얻으려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온 배고픈 백성들에게, 이제 곧 떠나면 자신을 보지 못해 흔들릴 못난 제자들에게 상식에서 벗어난 빵과 음료를 건네주십니다.

그렇다면 그분께서는 왜 온전한 인간으로 오셨으면서도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감히 인간의 그릇으로는 담을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그래서 ‘상식적이지 않다.’라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어마어마한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상식을 초월한 사랑을 먹고 자란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비상식적인 성체성사의 신비를 누리는 우리라 할지라도 여전히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것들은 주다 보면 결국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이지만 사랑만큼은 주어도주어도 마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네가 나에게 해준 만큼 나도 너를 사랑한다.’는 식의 계산적이고 상식적인 사랑이 팽배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만은 결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만약 한계 없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사랑을 베푸는데 있어서 한계를 그어놓는다면 그것만큼 큰 배신은 없을 테니 말이지요. 그러니 비록 굶주린 오천 명의 배를 가득 채울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정에 굶주리고 상처받은 그들의 마음을 사랑의 따스한 온기로 가득 채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6월 9일, 연중 제10주일 : 루카 7,11-17.

11바로 그 뒤에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 예수님 초대

어느 분이 짧은 말로 예수님을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주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의 눈을 여시어 주님의 길을 보게 하시고, 저희의 귀를 여시어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아멘.”)

 

● 말씀 읽기

어느 분이 루카복음 7장 11절~17절을 큰 소리로 천천히 읽어주십시오.

 

●세밀한 독서

다음의 사항들을 살펴보며 본문의 말씀을 각자 천천히 읽겠습니다.

- 등장인물, 장소를 살펴 봅시다.(11~12절)

- 예수님과 함께 나인이라는 고을로 간 사람들은 누구와 마주칩니까?(12절)

- 죽인 이의 어머니는 어떤 상황에 있습니까?(12절)

-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어떤 마음이 드셨습니까?(13절)

- 예수님께서 관에 손을 대시고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14절)

-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16절)

복음말씀을 누가 한 번 더 천천히 읽어주십시오.

 

● 새겨 듣기

잠시 침묵 가운데 복음을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을 곰곰이 새기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집시다.(3~5분)

 

● 나누기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짧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실천하기

지난 주 결심하고 실천했던 것을 나누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측은히 여기시어 “울지 마라.”고 달래어 주시고, 그 외아들을 어머니에게 돌려주십니다. 누군가가 측은히 여겨질 때 작은 도움의 손길이라도 내미는 실천을 해 보도록 합시다.

 

● 청원기도

우리 반공동체, 본당공동체, 지역공동체, 우리나라, 지구촌공동체에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시간입니다.

 

● 마침기도

마침성가는 가톨릭 성가 48번을 부르겠습니다.

* 위 성가는 예시 자료입니다. 자유롭게 성가를 고르셔도 됩니다.

 

연중 제10주일 복음묵상 (루카 7,11-17.)

고태권(그레고리오)|동천성당 보좌신부

요즘 우리가 자주 쓰는 말이 있다면 ‘힐링(Healing)’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힐링은 치유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요. 그만큼 우리 사회가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 또는 지금은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이 힐링을 찾는다고 합니다. 본당에서도 이런 힐링의 의미로 예수님을 찾는 분들을 많이 뵙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힐링- 치유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막 로마 백인대장의 소중한 종 한 사람을 고쳐주십니다.(루카7,1-10) 그래서일까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해 줍니다. 이제 막 로마 백인대장의 종을 살려주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얼마나 기쁘고 의기양양 했을까요? 이제 그런 예수님의 무리가 ‘나인’이라는 동네 어귀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리 반대편에서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어떤 무리가 마주 옵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불쌍하기 이를 데 없는 과부의 외아들의 장례 무리입니다. 구약성경은 고아와 과부들의 권리를 챙겨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과부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작고 나약한 사람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서로 다른 분위기의 무리가 모른 척 비켜서지 않고 만납니다. 그 만남을 예수님께서 직접 앞장서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힐링이 시작됩니다. 그분 힐링의 특징을 오늘 복음을 들으며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의 힐링은 슬퍼하는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하고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루카 7,13) 치유해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기교 섞인 말솜씨가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따뜻이 품어 주시며 동감해 주시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분의 치유는 함께하여 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분의 힐링은 가르치려 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마음을 나누고, 관에 손을 대어 주시듯 어루만져 주심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힐링은 마냥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의 힐링은 힐링(Healing)을 넘어 ‘일으켜 세움(Standing)’으로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에게 말씀으로 그를 어루만져 주심과 함께, 과부의 젊은 아들을 일으켜 세우셨다고 전합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루카 7,14) 그분의 힐링은 세상에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말을 같이 들어주고, 좋은 조언을 하는 것을 넘어 상대방을 일으켜 세워주심(Standing)입니다. 더해서 그분의 치유는 죽었던 젊은이 한 사람만 치유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체험했던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세상에 선포하게 만드는 힐링이었습니다.(루카 7,16-17) 그래서 그분의 힐링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목표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체험하게 합니다. 그분은 힐링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활력 있게 깨어 움직이게 하심으로써 새로운 활력을 사람들에게 불어 넣어주십니다.

그분의 치유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치유(Healing)를 넘어 사람들을 ‘일으켜 세움(Standing)’으로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많은 상처와 시련을 겪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지난 한 주도 꽤나 지쳐 있거나 상처투성이일지도 모릅니다. 학생들은 학생대로, 취업 준비로, 직장에서는 직장상사의 눈치로, 아래에서는 치고 올라오는 직장후배 때문에, 그리고 가정의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곧 오늘날의 과부이며 복음에서 죽은 젊은 아들일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힐링을 찾습니다. TV, 영화, 여행 등 세상의 많은 것들이 여러분들에게 달콤한 치유를 약속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갖는 상처와 치유는 우리 구세주 예수님 안에서만 근원적인 치유가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번 주일복음의 말씀으로, 그리고 오늘 미사에서 성체로 우리를 만나 치유(Healing)를 넘어 일으켜 세움(Standing) 으로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 한 주도 힘내십시오! “젊은이여, 일어나라!”

 

6월 16일, 연중 제11주일 : 루카 7,36-8,3 또는 7,36-50.

36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37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38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39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40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41“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43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44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45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46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47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48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49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50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 예수님 초대

어느 분이 짧은 말로 예수님을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주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의 눈을 여시어 주님의 길을 보게 하시고, 저희의 귀를 여시어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아멘.”)

 

● 말씀 읽기

어느 분이 루카복음 7장 36절~50절을 큰 소리로 천천히 읽어주십시오.

 

● 세밀한 독서

다음의 사항들을 살펴보며 본문의 말씀을 각자 천천히 읽겠습니다.

- 등장인물과 장소를 살펴봅시다.

-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예수님을 초청하여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된 죄인인 여인은 어떻게 행동합니까?(37~38절)

-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에게 이 여인은 어떤 사람입니까?(39절)

- 많이 용서 받은 사람은 누구이며, 적게 용서 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 여인이 드러낸 사랑의 행위들을 살펴 봅시다.(44~46절)

-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봅시다.(48절, 50절)

복음말씀을 누가 한 번 더 천천히 읽어주십시오.

 

● 새겨 듣기

잠시 침묵 가운데 복음을 통해 들려 주시는 말씀을 곰곰이 새기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집시다.(3~5분)

 

● 나누기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들려 주시는 말씀을 짧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실천하기

지난 주 결심하고 실천했던 것을 나누어 봅시다. 내가 죄인으로 단정 짓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런 이가 있다면 그를 새로운 눈으로,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을 청해봅시다.

 

● 청원기도

우리 반공동체, 본당공동체, 지역공동체, 우리나라, 지구촌공동체에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시간입니다.

 

● 마침기도

마침성가는 가톨릭 성가 56번을 부르겠습니다.

* 위 성가는 예시 자료입니다. 자유롭게 성가를 고르셔도 됩니다.

 

 연중 제11주일 복음묵상 (루카 7,36-8,3.)

 황은모(요한)|반야월성당 보좌신부

오늘 복음 말씀에는 예수님 외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집으로 예수님을 초대한 ‘시몬’이라는 바리사이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고을에서 큰 죄인으로 낙인찍혀 있는 여인입니다.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인공일까요? 전체적인 줄거리를 살펴보면 예수님 앞에 깊이 회개하여 많은 죄를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가 더 주목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바리사이인 ‘시몬’의 비중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죄 많은 여자’는 말 그대로 ‘죄인인 여자’라고만 소개되어 있을 뿐, 이름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몬은 이름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것도 그였고, 오늘 이야기의 무대 배경도 그의 집입니다. 그래서 시몬의 입장, 그리고 죄 많은 여자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시몬과 예수님의 관계에 더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시몬은 바리사이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한 것과 예수님께서 이에 선뜻 응하신 것으로 보아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을 반대하고 악행을 일삼는 바리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어느 정도 호의를 가지고 있고 그분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전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그 이상의 것을 원하고 계셨지요.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원하고 계셨습니다.

물론 시몬이 ‘죄 많은 여자’처럼 아주 큰 죄를 지은 사람은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원하시는 회개도 큰 수고와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44절 이하의 내용처럼 그는 예수님께 발 씻을 물을 드리고 입을 맞춰 드리고 또 머리에 기름을 발라 드리면 되었습니다. 자신의 집에서, 자기에게 찾아온 손님에게 해 드리는 것이기에 그다지 큰 희생과 용기를 각오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조차도 하지 않았지요. 예수님과의 만남을 그저 형식적이고 무감각하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죄 많은 여자는 어떻습니까? 그는 시몬과 입장이 너무나 다릅니다. 그녀는 고을에서 죄 많은 사람으로 낙인 찍힌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시몬처럼 자기 집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상황이 아니라 큰 용기를 내어 남의 집으로 찾아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물로써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셔 드려야 했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려야 했습니다.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드린 것도 얼굴이나 머리가 아니라 발이었습니다. 시몬의 입장과는 달리 큰 희생을 각오해야만 하는 일이었지요.

사실 우리들 가운데 온 세상에 낙인이 찍힐 만큼 큰 죄를 지은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거나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죄 많은 여자보다 오히려 시몬의 모습과 더 닮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름 없이 등장한 이 죄 많은 여자의 입장과 그녀의 행위는 시몬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경고 메시지가 되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다지 큰 죄가 없다고 해서,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있다고 해서 시몬처럼 자신의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제 죄 많은 여자와 같은 상황이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물로 발을 씻겨드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자신의 눈물로 그분의 발을 씻겨 드려야 합니다. 얼굴에 입을 맞추기보다 그분의 발에 입을 맞추어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욱 큰 희생과 용기가 필요하다는 뜻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곁에 머무르며 그저 식사나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께 대한 단순한 호의와 좋은 감정에만 머물기를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끊임없이 회개하고 사랑을 고백하면서 당신에게 입 맞추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회개와 사랑을 위한 행위가 큰 수고로움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와 시간들을 무감각하게 흘려보내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린다면, 먼 훗날에는 더 큰 용기와 더 많은 희생을 통해서만 용서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하겠습니다.

 

6월 23일, 연중 제12주일 : 루카 9,18-24.

18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9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20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22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23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예수님 초대

어느 분이 짧은 말로 예수님을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주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의 눈을 여시어 주님의 길을 보게 하시고, 저희의 귀를 여시어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아멘.”)

 

● 말씀 읽기

어느 분이 루카복음 9장 18절~24절을 큰 소리로 천천히 읽어주십시오

 

● 세밀한 독서

다음의 사항들을 살펴보며 본문의 말씀을 각자 천천히 읽겠습니다.

- 군중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이야기합니까?(19절)

- 베드로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합니까?(20절)

- 예수님은 당신을 어떻게 부르십니까?(22절)

- 사람의 아들은 어떤 일을 겪어야 합니까?(22절)

-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23절)

복음말씀을 누가 한 번 더 천천히 읽어주십시오.

 

● 나누기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들려 주시는 말씀을 짧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실천하기

지난 주 결심하고 실천했던 것을 나누어 봅시다. 예수님 때문에 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 보고 실천하도록 합시다.

 

● 청원기도

우리 반공동체, 본당공동체, 지역공동체, 우리나라, 지구촌공동체에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시간입니다.

 

● 마침기도

마침성가는 가톨릭 성가 29번을 부르겠습니다.

* 위 성가는 예시 자료입니다. 자유롭게 성가를 고르셔도 됩니다.

 

연중 제12주일 복음묵상 -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루카 9,18-24.)

김요한(세례자요한)|매호성당 보좌신부

부제품을 받기 전 겨울, 한 달 동안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여느 여행이 그렇듯, 그 시간은 저에게 많은 메시지를 전해주었습니다. 그 중의 한 가지는 ‘우리나라’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한국 안에 머물러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한국 밖에서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인식이 그것입니다. 외국인에게 자신을 한국인이라 소개하면 항상 물어오는 낯선 질문이 있습니다. 그 질문은 “South or North?(남한이야, 북한이야?)”였습니다. 저는 어쩌면 우리나라의 분단 현실을 잊고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6월 25일과 가까운 오늘, 우리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한 민족이 가지고 있는 분단의 아픔을 새삼 떠올리고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합니다. 북한의 대처에 따른 국제 정세나 우리나라 내부의 분위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대북관계를 신경 쓰고 있지만 진정한 ‘화해와 일치’의 길을 찾고 있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복음 말씀은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과 예수님의 수난 부활 예고에 이어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베드로의 고백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에 이은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영광의 표징이 아닌 수난의 예고였습니다. 모든 이를 구원하시는 구원자 그리스도는 자신의 이익이나 영광을 찾는 존재가 아닌,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통일을 해야 한다, 해서는 안 된다.’로 분분한 여론은 ‘화해와 일치’가 아닌 ‘자신의 이권(利權)’이 가치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 됨’의 열쇠는 고통을 받아들임에 있다고 말입니다. 서로를 위해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어떤 표면적 일치나 화해는 무의미할 것입니다. 서로를 위해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어떤 경제적 이득이나 효율성은 무의미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 민족의 분단현실을 바라보고 있나요? 한 나라 안에서도 남과 북으로 갈라진 현실을 나는 어떤 방법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맞아 우리 곁에 서 있는 가장 가련한 이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있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임에 사랑이 있음을 우리가 깨닫게 되길 희망합니다.

  

6월 30일, 연중 제13주일 : 루카 9,51-62.

51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57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 예수님 초대

어느 분이 짧은 말로 예수님을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주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의 눈을 여시어 주님의 길을 보게 하시고, 저희의 귀를 여시어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아멘.”)

 

● 말씀 읽기

어느 분이 루카복음 9장 51절~62절을 큰 소리로 천천히 읽어주십시오.

 

● 세밀한 독서

다음의 사항들을 살펴보며 본문의 말씀을 각자 천천히 읽겠습니다.

-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습니까?(51절)

- 당신에 앞서 보낸 심부름꾼들은 어느 마을로 들어갔습니까?(52절)

-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53절)

- 야고보와 요한 제자는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에게 어떻게 하려합니까?(54절)

- 그들이 다른 마을로 들어갔을 때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 사람들 중에는어떤 사람들이 있었습니까?(57절, 59절, 61절)

- 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58절, 60절, 62절)

복음말씀을 누가 한 번 더 천천히 읽어주십시오.

 

● 나누기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들려 주시는 말씀을 짧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실천하기

지난 주 결심하고 실천했던 것을 나누어 봅시다.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데 해야 할 일, 또는 포기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걸 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봅시다.

 

● 청원기도

우리 반공동체, 본당공동체, 지역공동체, 우리나라, 지구촌공동체에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시간입니다.

 

● 마침기도

마침성가는 가톨릭 성가 445번을 부르겠습니다.

* 위 성가는 예시 자료입니다. 자유롭게 성가를 고르셔도 됩니다.

 

 연중 제13주일 복음묵상- 교황주일 (루카 9,51-62.)

이수환(바오로미키)|원평성당 보좌신부

오늘의 이야기는 ‘길 위에서’ 벌어집니다. 그 길은 어떤 길입니까?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러 가는 길입니다. 그 길 위에서 예수님 일행은 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 나를 따라라.’하고 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고 하십니다. 보금자리도 없는 그 길(십자가의 길)의 어려움을 드러내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 마음 편할 수 없는 이 길, 고통스러운 이 길을 그래도 따르고자 하느냐?

두 번째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따라라.’하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도록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까요?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시고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들으면 서운한(?)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속뜻은 하느님 나라를 알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이렇게 묻겠지요? - 다른 어떤 일보다 하느님 나라를 알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세 번째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은 하지만 가족들에 대한 미련을 가집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들에게 어떤 것을 이야기합니까? 예수님이 좋아서 그분을 따르겠다고 하지만 여전히 세상 것들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들에게 이렇게 묻겠지요? - 세상 것들에 대한 미련을 끊어버릴 수 있느냐?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스스로를 한 번 돌이켜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면 다시 한 번 힘을 내도록 합시다. 응원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