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유학을 오면서 이탈리아어도 모르고 왔으니 고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로마 신학교에서는 전 과목 교과서는 물론 강의도 라틴어 원어로 하니 나처럼 미리 라틴어를 배우지 않은 사람은 이중삼중 고생이다. 더더구나 우리는 영어를 중·고등학교에서 배웠지만 실생활에 적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외국 사람을 대할 때에는 항상 어렵다. 많은 사람이 국제회의에 가서 영어를 모르기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는지 짐작이 간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영어회화만이라도 능통하게 했다면 그때 말 때문에 그렇게 고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영어, 프랑스어를 잘 하는 사람들은 이탈리아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 자기가 아는 영어나 프랑스어로 말해버린다.
특히 동양권 학생 중에서도 한국과 일본, 중국 학생들은 언어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한다. 동양권 학생이라 하더라도 베트남 학생들은 라틴어와 이탈리아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 프랑스어로 이야기해버린다. 왜냐하면 제2차 세계대전 전에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였기 때문에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어를 자국어처럼 잘 했다. 그때 우리끼리 하는 말이 “이왕 식민지가 되려면 프랑스나 영국 식민지가 되었더라면 말이라도 하나 제대로 배웠을 텐데! 세상이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일본의 식민지가 돼서 이 고생”이라고 한탄한 일이 있었다.
우리 학교는 50여 개국 나라에서 모인 국제학교였으므로 말 때문에 폭소를 터뜨리는 일이 가끔 있었다. 우리 반에 이라크 바그다드 교구의 쟈오지오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학생들의 옷을 관리하는 수녀님께 스웨터 하나 달라는 말을 이탈리아어로 ‘부인 하나를 보내달라.’고 해버렸다. 이탈리아어로 ‘부인’은 ‘Moglie’라고 하고 스웨터는 ‘Maglie’이기 때문에 ‘a’를 ‘o’로 잘못 발음하면 ‘스웨터’가 ‘부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수녀님은 농담 삼아 “여기 당신한테 보낼 부인이 한 명도 없소!”하고 대답했다. 바로 그 친구가 백화점에 가서 봉투를 사려고 했는데, 점원이 얼굴이 빨개지면서 대답도 하지 않고 홱 돌아서버린 사건도 있었다. 왜냐하면 ‘Busta’(봉투)는 복수형이 ‘Buste’인데 잘못 발음해서 ‘Busti’를 달라고 했다. ‘Busto’는 브래지어를 뜻하는데 ‘Busti’는 브래지어의 복수형이었다. 그러니 젊은 여자 점원은 수단을 입은 신학생들이 ‘Busti’를 달라고 하니, 자기를 놀리는 줄로만 안 것이다. 이외에도 재미나는 일이 한두 가지 일이 아니었다. 우스운 일도 많았다.
어느 날, 당시 한국에서 유명한 여배우 최은희 씨가 로마에 왔었다. 대사관에는 이탈리아어를 하는 사람이 없다고 나에게 하루쯤 안내해 달라는 부탁을 해서 같이 베드로 대성전을 구경한 일이 있었다. 최은희 씨는 이탈리아를 떠나면서 나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무엇인가 선물하고 싶다고 했으나 몇 번이나 거절해도 간곡히 한국적인 선물을 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한국적이라는 말을 듣고 고추장이 생각나서 “고추장을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하고 말했다.
몇 달이 지났을까, 까마득하게 그 사실을 잊고 있었는데 로마 국제공항 세관에서 쪽지가 왔다. 전화를 걸어보니 “당신 앞으로 물건이 왔는데 물건이 썩은 것 같아서 내버릴까 하는데 혹시 찾아갈 마음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무엇일까 하고 공항으로 찾으러갔더니 고추장이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비행기 안에서 고추장이 괴어올라서 상자는 터져 있고 포장지 바깥으로는 고추장이 삐질삐질 나와서 검붉게 눌러 붙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세관 직원이 보고는 썩었는데 여기서 버려줄까 하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고맙지만 한국에서 온 것이니까 그냥 가져가서 내가 갖다 버리겠다고 했다. 설명을 해봐야 그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므로 빈 상자나 하나 달라고 해서 종이에 싸서 담아 들고 왔다. 그날 저녁에 한국 학생들이 다 모여서 고추장 파티를 한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거의 반 이상이 밖으로 흘러나와 눌러 붙어 버려서 얼마 먹지도 못했다. ‘아이고, 아까워라!’싶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로마에 십여 년 살면서 기억에 남는 것이 한두 가지랴만, 처음으로 교황 비오 12세를 알현할 때 받은 감동은 지금도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국회의장 신익희 씨와 김동성 씨가 영국 런던의 엘리자벳 여왕 대관식에 참석하고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1953년 7월 2일에 로마에 도착했다. 7월 5일 두 사람은 교황 성하를 알현하게 되었는데 이 때 우리 신입생 세 사람도 함께 교황님을 알현할 수 있었다. 비오 12세 교황님을 처음 뵈었을 때 그 분의 인상은 ‘이런 분도 이 세상의 사람인가!’하고 느낄 정도로 온화하고 맑고 밝았다. 바로 천사와 같은 면모가 저런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인생의 후년에 가서 남이 보기만 해도 감명을 받는 저런 모습을 지니기까지 지난 날 그분이 지닌 내면세계와 삶의 발자취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비오 12세 교황님을 그 후에도 알현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비오 12세 교황님께서 교황으로 당선되실 때의 이야기가 하나 떠오른다. 교황선거를 위해 추기경님들이 행렬해 나갈 때 그 행렬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다들 “저분이 교황님이다!” “바첼리 교황님 만세!”라고 외쳤다고 한다.(바첼리는 교황 되시기 전의 이름이다.) 이 기회에 교황 선거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리고자 한다. 교황은 추기경단이 투표로 선출한다. 외부와 일체 통교는 금지되고 어떠한 외부의 영향도 받지 않는 상태에서 하루에 투표를 세 번 하는데, 첫 번째는 인사치레로 서로서로 안부를 묻기 위해 한두 표씩 던지기 때문에 거기서 교황이 결정 날 리가 없다. 두 번째부터 본격적인 투표를 하는데 결정이 되지 않으면 세 번째 투표로 이어진다. 또 결정이 나지 않으면 그 이튿날, 같은 방법으로 세 번 투표를 치르게 된다. 며칠씩 당선이 되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모든 추기경들의 피정이 시작되고 대제(단식)를 지키며 기도 중에 투표를 하게 된다. 드디어 교황이 선출되면 투표용지를 선거장에 설치한 난로에 태우기 때문에 그 연기가 외부 굴뚝으로 피어오르고 외부에서는 그 흰 연기를 보고 교황이 선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재미나는 얘기가 있다. 중세 때 각 강대국들이 교황을 자기편으로 모시기 위해 교황선거 때가 되면 서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세속의 온갖 짓을 다 했다한다. 그래서 어떤 교황께서 “교황선거는 외부와의 통교는 일체 없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니 선거가 끝나도 끝난 줄도 모르니 선거의 결과만이라도 빨리 알고 싶다고 아우성들을 치니 빨리 알리는 방법으로 어떤 시종이 연구 했다는 얘기가 다음과 같다. 당선이 됐을 때는 투표용지만 태우게 해서 흰 연기만 나게 하고 되지 않을 때는 젖은 지푸라기를 섞어 태우게 해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게 했다는 것이다. 교황 선거 때는 바로 그 굴뚝의 연기를 보기 위해 수많은 군중들이 모인다. 나도 몇 번이나 베드로 대성전 광장에서 그 굴뚝을 쳐다봤는지…. 그런데 비오 12세 때에는 투표 두 번만에 결정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처음에는 투표를 인사치레로 하고, 그 다음 두 번째 투표에서 정족수에 맞게 당선되신 것이다.
비오 12세 교황은 무슨 윤허를 얻으러 가면 거의 거절을 하지 않는다는 정평이 나 있었다. 그래서 그분은 ‘No’를 할 줄 모른다고 해서 우스개 비슷한 에피소드가 많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어떤 사람이 교황님을 알현하고 나오는데 문 밖까지 들리도록 교황님께서 “No! No!”하시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시종들이 보니 그 사람은 코카콜라 회사 선전부장이더라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더니, 코카콜라 회사 선전부장이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대신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코카콜라를 마십시다.”라고 하도록 성하께 청했다는 것이다. 교황님께서는 허락하셨다가 이내 그 선전부장의 뒤통수에 대고 안 된다고 “No! No!”를 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이 농담은 지어낸 것이겠지만, 비오 12세 교황님께서는 청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것을 뜻한다. 비오 12세 교황은 1876년에 태어나서 1939년 교황 위에 올랐고, 내가 신품 받은 다음해, 즉 1958년 10월 9일 여름 별장 카스텔 간돌포에서 돌아가셨다. 나는 훗날 ‘가톨릭신문’에 비오 12세 교황의 알현기를 다음과 같이 썼다.
교황 성하 알현기 (비오 12세)
(전략) 《우리들은 교황님의 인자스러운 말씀에 그동안 불안했던 마음도 또 물으심에 대한 불안도 잊어버리고, 우리도 모르게 따라 웃으며 성하를 쳐다보았습니다. “Cari, miei, figli!”(이탈리아어로 ‘사랑하는 아들들아!’라는 뜻. 교황께서는 주교 이상은 형제라 부르시고 신부 이하 신자는 아들로 부르신다.) 하시며 우리들 하나하나를 돌아보신 다음 손을 내미신다. 우리는 차례로 교황님 손에 친구했습니다.
잡은 손의 촉감은 따뜻함과 부드러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성하께서는 그냥 우리 손을 잡으신 채 “공부하기에 힘들지 않느냐?”하시며 물으시는 것이 어쩌면 그렇게도 다정합니까! 나 같은 둔재가 왜 힘들지 않겠습니까만 감히 ‘네!’하고 대답을 못하겠습니다. 또한 부산 영도산 기슭의 비 오면 비가 새고 바람 불면 바람이 들어오는 판잣집(피난 시 성신대학 임시교실)에서 낮이나 밤이나 학업에 노력하시는 신부님들과 형님들을 생각한다면 무엇이 부족하여 힘들다고 하겠습니까!
“무엇을 공부하지?”하시기에 차례로 말씀드렸습니다. “철학이 둘, 신학이 둘입니다.” “재미있나?” 하시고는 또 웃으시면서 “침식은 불편하지 않아? 한국보다 날씨가 퍽 더울 걸? 밤에 조심해야지.” “로마는 밤공기가 낮에 비해 너무 차가워지는 까닭입니다.” “기후가 바뀌면 첫째 건강에 조심하고, 너무 공부에 무리하지 말 것이다. 앞날에 네가 할 일을 위하여 물론 학문도 중요하나 우선 건강에 유의해야지….”
어쩌면 그렇게도 정답게 말씀하십니까! 먼 이역에서 귀향한 어린 아들을 앞에 앉히고 걱정스럽게 애타게 그리웠던 애정을 쏟아가며 손을 잡고 말씀하시는 어버이들의 사랑과 다르다 할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듣다가 공연히 향수에 잠겨 이미 귀천하신 어머님과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번갈아 눈앞을 스침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성하의 그 다정한 말씀이 그 옛날을 상기시키고 손을 잡으시며 내려다보시니 어머님을 그려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방학이 시작되었지?” “네! 곧 별장에 갑니다.” “그래, 방학 동안에는 마음과 몸을 푹 쉬고 앞날의 교회 지도자로서, 사제로서 부끄럽지 않을 생활을 하기 위하여 첫째, 건강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공부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옛날 격언에 ‘건전한 몸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하였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지금 싹튼 묘목들이다. 그 묘목들이 앞으로 클 수도 있고 시들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니 사랑하는 아들들아! 너희들 자신이 그 묘목들을 몸으로 풍우한서(風雨寒暑)를 막아주어야 할 것이다. 힘 자라는 데까지 잡초를 뽑아버리고 잘 길러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들아! 너희들은 곡식을 아낄 줄 아는 일꾼이 되어야 하며 양을 사랑할 줄 아는 착하고 용감한 목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너희들 어깨에 무거운 짐이 놓여진 것을 잊지 말고 항상 인자하신 성모님께 기도하자. 특히 한국 신학교의 어려운 사정과 성직자, 수도자들이 받는 괴로움이 많음을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괴로움을 극복함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으니 괴로움이 곧 즐거움일 것이며 또 불쌍한 영혼을 위하여 받는 것이라면 더욱 천주께서 원하신 바요, 그 영광은 너희들을 영영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도 기도 중 너희들과 너희들의 부모형제와 은인을 잊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또한 신학교와 모든 성직자, 수도자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빌며 성인성녀들께 전달을 구하고 우리 같이 기도하자.”
말씀이 끝나자 한국의 형제들을 한 번 더 그려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잠깐 계시다가 성하께서는 고향에 계시는 부모형제의 안녕과 또 시간이 허락하는 한 편지를 자주 하라는 것 등 팔십 줄에 드신 노인으로서는 너무나 세밀하고 부드럽게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손을 놓으시고 옆에 시종 몬시뇰이 가져오신 메달을 집으시며 “이것은 나를 방문한 기념으로 드리는 작은 선물입니다.”하시며 신 의장부터 나누어 주셨습니다. 파란색 봉투 속에는 은메달이 들어 있습니다. 전면에는 성하 반신초상이 박혀있고 후면에는 성모상이 박혀 있습니다. 성하께서는 나누어주신 후 차례로 손을 꽉 잡아 주시고 의장 일행에게 “찾아주신 데 감사합니다. 또 뵈올 것을 희망하며 좋은 여행이 앞으로 여러분을 기다릴 것을 바랍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하시니 신 의장과 김 의원께서 “어지러운 세상에 빛이 되어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하고 겸손 되이 머리를 숙였다. 성하께서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우리들을 향하여 “별장에 가면 종종 보겠지.(우리 학교 별장은 알바노 호반에 카스텔간돌포라는 곳에 성하 별장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그러면 방학 동안 잘 쉬고 앞날의 큰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의 준비를 잘 해야지….” 하시며 양 팔을 벌리시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전능하신 천주….”하고 라틴말로 강복 하신 다음 우리는 또 교황님의 손에 친구했습니다. 성하께서는 두 손을 흔드시며 옆방으로 들어가시고 알현은 끝이 났습니다. 우리는 들어올 때 가졌던 그 무엇과 또 다른 것을 느끼며 방의 크기도 장식도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묵묵히 안내자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걸었습니다.
교황이라면 어딘지 모르게 ‘엄’자가 붙어 있어 어렵게만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슴이 곤두박질을 하고 입에 침까지 말라붙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인자하심’이 한량없다는 것입니다. 비오 12세 교황 성하를 알현한 사람이면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바티칸 시국 문을 나설 때 스위스 위병이 ‘차렷’, ‘경례!’로 전송합니다. 성하 방문객에 대한 예의라고나 할까요? 신 의장과 김 의원께서는 기다리던 차로 호텔로 가시고 우리들은 학교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어느덧 해는 하늘 높이 뜨고 시원하던 아침공기와 푸르던 하늘은 뿌연 먼지로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유유히 흐르는 ‘때벨’강을 발아래 굽어보며 언덕길을 오르는 우리들의 코와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습니다.》 (1955. 4. 30일자 가톨릭신문)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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