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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해 및 월간 〈빛〉 30주년 기념 신앙수기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②
그 날을 꿈꾸며


이나오까 아끼(쥴리아)|비산성당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하면 아주 대단한 일, 선택 받은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평범하기만 한 내가 하느님께로부터 수많은 기적, 즉 은총을 받았기 때문이다.

17년 전, 나는 대학교 4학년 때 교환유학생으로 중국 상해에 가서 1년 동안 어학연수를 했다. 그때 지금의 남편을 만나 2년 동안 연애한 끝에 일본 교토에서 바다를 건너 한국으로 시집을 왔다. 시할머니, 시어머니, 남편, 그리고 시동생 등등 시댁 식구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였기에 원래 집안 종교가 불교인 나도 자연스럽게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시집 온 지 3개월쯤 지났을 때였던가, 어머님께서 내 이름으로 예비신자교리반에 등록했다고 말씀하셨다. 아니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그때는 알아듣지 못 했을 것이다. 중국에서 만나 결혼한 우리 부부의 공통어는 그 당시에는 중국어였다. 시집을 오기 전 한국어를 조금 배우기는 했지만 어머님이랑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편이 어색한 중국어와 손짓발짓으로 설명을 해준 덕분에 나는 예비신자 교리반에서 하느님과 천주교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아마도 시댁식구가 다른 종교를 믿었다면 나도 당연히 그 종교를 믿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선택하신 분은 하느님이셨다.

불교집안에서 자란 나였지만 그럼에도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아마도 일본 사람들의 종교관 때문일 것이다. 일본은 종교가 뿌리 내리기 어려운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예부터 이어 온 민간신앙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일본 사람들은 모든 사물이나, 장소, 자연적인 현상에는 그것을 다스리는 팔백만 가지의 신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일본사람들의 종교관을 잘 나타내는 재미있는 말이 있다. “장례불교”라는 말이 그것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부모들은 그 아기를 신사에 데리고 가서 신도(神道)의 의식을 통해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도록 기도를 하고, 그 아이가 자라서 결혼할 나이가 되면 신앙이 없어도 아주 엄숙하고 멋진 교회나 성당에서 성직자 앞에 서서 사랑을 맹세하고, 죽고 나서는 불교양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일생을 마감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많은 일본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만 이뤄진다면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또 다른 신이든 가리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해서 나의 신앙생활은 시작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교리를 배우는데 교리책에 나오는 단어들이 나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말들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느님께서 나의 한국어 실력으로는 도저히 천주교 교리를 배울 수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나에게 꼭 필요한 분을 미리 준비해두셨다. 나를 담당하신 최 요한 수녀님은 일제강점기 때 고등교육까지 받으셔서 일본어를 아주 능숙하게 잘 하셨다. 아니 능숙한 정도가 아니라 일본 사람인 나보다 더 아름다운 옛날 일본어를 잘 구사하셨다. 수녀님께서는 나를 다른 분들과 같이 교리를 배우게 한 다음, 끝나고 나면 다시 일본어로 교리를 가르쳐주셨다. 그렇게 그 해 성탄절에 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세례명은 쥴리아. 일본에서 순교한 한국인 최초의 순교자 오타 쥴리아에서 딴 이름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하느님께서는 나를 이미 오래전에 불러주신 적이 있었다. 내가 일곱 살 때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서 유치원을 옮기게 되었는데 이사를 간 동네에서 새로 다니게 된 유치원이 바로 가톨릭유치원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 유치원에 다니던 기간은 고작 2개월, 아주 짧은 기간이라 그 유치원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은 별로 없지만 두 가지 일을 기억하고 있다. 하나는 일본어로 된 주모경 기도문, “치치토 코토 세이레이토노 미나니오이테. 아멘.” 그리고 하나는 원장선생님의 성함이 오노 토마스 선생님이었다는 것. 어린 마음에도 그 이름은 아주 낯설게 느껴졌는데, 외국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기억하기 쉬었던 것 같다. 세례를 받고 난 후 친정 동네에 있는 성당에 처음 미사드리러 갔을 때 미사를 봉헌하시는 신부님을 뵈니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그랬다. 바로 그 유치원 원장선생님이셨던 오노 토마스 선생님이 아닌가! 18년 만의 만남이었다. 그 선생님은 당연히 나를 기억하지 못하실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 하느님께서 그 분을 만나게 해 주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세례를 받고 레지오 활동을 하면서 딸, 아들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내게 우울증이 찾아왔다. 심할 때는 육아는 물론 일상생활도 하기 힘들었다. 아이들은 어머님께 맡길 수밖에 없었고 가족 모두 내가 우울증을 극복하기를 바라며 격려와 기도를 해주었다. 죽을 만큼 힘들었고 희망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왜 나를 한국에 오게 하여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건가, 싶은 생각에 하느님을 원망한 적도 있었다. 내가 힘들어 할 때마다 어머님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겨낼 수 있는 시련만 주신대. 그러니까 꼭 이겨낼 수 있다.”고 하시며 곁에서 늘 격려해주셨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어머님 말씀대로 우울증은 서서히 나아졌다. 그 때는 너무나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나에게 일찍 이런 시련을 주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이 한국에서 살아간다면 언젠가 분명 큰 벽에 부딪칠 때가 올 것이다. 그것이 10년 후일지 20년 후일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우울증을 앓았을 때 시부모님과 친정부모님께서 아직 젊고 건강하셔서 내가 완치될 때까지 곁에서 도와주실 수 있었다. 만약 더 늦게 그 병을 앓았더라면 더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프고 나니 부모님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 건강하게 산다는 것의 소중함, 그리고 가족들과 웃고 울면서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깨닫게 되었다. 정말로 이 세상에는 헛된 일은 없는 것 같다. 그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에….

 병을 극복하고 나서 본당 자모회장님의 권유로 소년Pr. 단장을 맡게 되었고, 교리에 대해 잘 몰랐던 내가 교리교사까지 하게 되었다. 교리교사가 된 이상 교리에 대해 모른다고 할 수 없어서 자료를 찾고 성경도 읽으며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아주 조금씩이지만 교리를 알아가게 되었다. 여전히 많이 부족하지만 젊은 봉사자들이 많지 않은 우리 본당에서 어르신들이 칭찬을 해주실 때마다 나는 늘 부끄럽게 생각하곤 했다. 왜냐하면 내가 정말 신앙심이 깊어서 기쁜 마음으로 스스로 봉사를 자처했다기보다는 소심한 부분이 있어서 누군가의 부탁을 받으면 거절을 못해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하게 지내는 자매님에게 그 얘기를 하니 그 자매님이 ‘그것은 소심한 것이 아니라 성실한 것’이라고, ‘하라고 해도 안 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냥 받아들이는 것도 축복이고 그런 삶이 성모님의 삶’이라고 말해주었을 때 나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구나, 지금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축복이구나!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 일을 주시는 것은 어떤 뜻이 있어서 그러시는구나.’하고 받아들였다. 그 뒤 나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일본과 한국은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서로 가까워지기 어렵다. 어떤 일에 있어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가 그렇듯이 앞으로도 일본과 한국은 정부차원에서의 관계가 개선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다. 하지만 민간차원에서는 희망이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마음으로 풀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그런 역할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아닐까! 나는 한국과 일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큰 힘은 없다. 하지만 꽁꽁 얼었던 얼음이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는 물로 인해 녹아내리듯이 나도 내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씩 열 수 있는 그런 작은 일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작년 이맘때쯤 나는 일본의 국가시험인 통역안내사(가이드 및 통역) 시험에 합격해서 생애 처음으로 직업이 생겼다. 그러면서 나에게 꿈이 생겼다. 그 꿈이란 언젠가 내가 가이드로 사람들을 일본성지에 인솔해 가서 안내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세례명을 딴 순교자 오타 쥴리아가 살았던 ‘나가사키’에 나도 직접 가 보는 것이다. 아직은 준비하고 있는 단계라 통역안내를 하는 일을 시작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앞으로 아이들을 키우면서 조금씩 준비를 해서 언젠가 나의 꿈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그 날을 꿈꾸며 나는 이번 토요일에도 주일학교 아이들을 만나러 주저 없이 비산성당으로 향한다.

 * 8월 호에는 가작 수상자 정영란(크리스티나, 약목성당) 씨의 작품이 실립니다.(가나다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