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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마음으로 세상보기
성숙한 기도에 대하여


하성호(사도요한)|1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얼마 전 교우들과 함께 모(某) 성지에 순례를 다녀왔다. 그곳 담당 신부는 신자 다루는 재주가 특출하였다. 그러자 여러 해 전 이야기가 기억났다. 본당 부녀회에서 모(某) 성지에 순례를 갔는데 성지 담당 신부가 “… 어느 날 꿈에 성모님이 ‘아들아, 걱정 마라. 내가 1천만 원씩 봉헌하는 천사 300명을 불러주마.’하고 약속하셨어요.”라며 강론을 하였고, 그날 본당 자매 2명이 1천만 원씩 봉헌하였다고 했다. 정작 자기네 본당신부는 본당재정 걱정으로 열병을 앓고 있었는데….

어느 민족이나 다 그렇지만 우리 민족은 유별나게 “복 받으시오.”에 약한 민족이다. 물론 복 받아라, 하는데 싫어하는 사람도 없고 복도 많이 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좀 더 성숙한 기도로 내가 이웃의 복이 되는 것은 어떨까? 예를 들어 “예수 믿어 복 받으세요!”라는 축원을 들을 때도 “내가 예수님을 믿어 나도 예수님을 닮고,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어야지!”라고 말이다. 하지만 “예수 믿어 복 받으세요!”라고 축원하면 건강, 사업, 자식, 출세 등등의 욕구 충족만을 염원하지 않는가? 이런 형태의 기도는 너무나 수준이 낮다.

지나치게 현세적인 부귀영화에 집착하는 기도는 자칫 우리 민족 종교심성 안에 깊숙이 잠재하는 귀신숭배식 축원(祝願)의 영역을 탈피하지 못한다. 그래서 ‘신앙의 해’를 보내며 그리스도인의 참된 기도에 대한 묵상을 골똘히 하다가 한밤중에 한 줄 메모를 남겼다. “성숙한 기도는 비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이다. 거룩한 아버지가 되어가고, 거룩한 아들이 되어가고, 거룩한 영이 되어가는 것이 기도이다.”

생각해보자. 예수님은 기도하는 법도 가르쳐 주셨지만 당신도 자주 기도하셨다고 복음서는 전해주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얻기 위해 그렇게도 자주 기도하셨을까? 건강, 출세, 사업, 부귀영화…? 세상적인 부귀영화만을 축원하는 사람의 눈높이로 보면 하느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하나도 들어주신 적이 없다. 그래서 거듭 예수님의 기도를 골똘히 묵상해보게 된다. 죽음이 다가오는 절박한 순간에 예수님은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 26,42)라고 기도하셨고,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요한 17,4)라고 기도하셨다.

일생 동안 바치신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이 “아버지의 뜻”이 되어가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라고 말씀하셨고, 아버지와 하나 되기 위하여 죽음에 이르도록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 8)

‘신앙의 해’를 보내며 성숙한 기도쪽으로 돌아설 가망이 있는 사람들을 설득해보고 싶어 별의별 궁리를 다 해보다가 “여러분 가운데 12%만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수제자는 12제자이니까요.”라고 하며 엉터리 퍼센트(%)를 교우들에게 들이밀어 보았다. “천만 원씩 봉헌하는 천사 300명”이란 수법은 먹혔는데, 12%는 잘 먹힐 것 같지 않다. 기도 효험이 결국 그리스도가 되어 이웃에게 복이 되어라 하니까 그건 자신이 없는 모양이다.

시몬 베유(1909-1943)라는 프랑스 여류철학자에 대한 단상을 적은 어느 책의 다음 한 줄이 성숙한 기도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에 정말 긴 여운을 남긴다. “결국 베유에게 있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불행한 사람에게 목숨마저 내놓을 수 있는 예수의 삶을 반복한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삶을 반복하고자 하는 사람은 분명 성숙한 기도를 바칠 것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자신이 바로 그리스도가 되어가는 것이다. ‘신앙의 해’에 추구하는 ‘새 복음화’의 핵심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을 믿고, 믿는 것을 행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