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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세계
요한복음의 예수 이야기(2)


이재수(시몬)|신부. 큰고개성당 주임

세례자 요한 (요한 2,22-36)

나와 내 제자들이 유다 지역에서 가르치면서 세례를 베푸는 한편, 요한은 사마리아에서 자신의 일을 계속했다. 혼인의 예를 들자면, 즉 그가 혼인을 준비하는 중요한 인물이라면 나는 신랑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이제 그의 사명은 끝났다. 애초부터 “그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는 자신을 참으로 겸허하게 처신한 위대한 사람이었다. 

 

사마리아 여인 (요한 4,1-54)

지름길을 택해 갈릴래아로 가기 위해 사마리아를 들렸다. 오전 태양 빛이 한창 따가운 때라서 더위에 지쳐 시카르라는 마을에서 가까운 야곱의 우물가에 앉았다. 제자들은 음식을 사러 마을로 들어간 뒤였다. 혼자 우물가에 앉아 있을 때 한 여인이 물을 길으러 나왔다. 그녀에게 마실 물을 청했더니 그녀는 놀라는 몸짓으로 움찔 물러나는 것 같았다. 남녀가 단둘이 대화한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별로 좋지 않게 보던 때였다. 더구나 나는 유다인이었다.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은 오래 전부터 서로 상종하지 않았고 원수를 보듯 서로 피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내가 누군지 알기라도 했다면 당신은 나에게 생명의 물을 달라고 청했을 것.”이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가 되받았다. “내가 당신을 알다니요! 그럼 당신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하다는 말인가요?” 나의 ‘생명의 물’은 그녀가 생각하는 우물물과는 달랐다. 나는 그녀에게 성령의 물을 줄 것이다. 그 물은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 변치 않고 영속하는 우물물이다. 여인은 목마르지 않을 물을 달라고 청했다. 이제 그녀는 매일 물을 길으러 오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내가 그녀의 비정상적인 결혼생활을 드러내자 그녀는 놀라면서 서둘러 화제를 딴 곳으로 돌렸다. 실은 그녀는 다섯 번이나 결혼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었다. 새로운 화제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가까운 게리짐 산 위의 사마리아 성전인가, 아니면 예루살렘 성전 중 어느 성전이 참 하느님의 경배의 장소냐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성전의 장소로 왈가왈부하지 않을 날이 다가온다고 했다. 아버지께 대한 경배가 영적인 경배이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나는 일일이 다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경배의 장소에서 새로운 성전으로 화제를 옮겨갔다. 경배 참례자들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나를 통해서이다. 여인은 내가 하는 말을 어렴풋이 알아듣고는 오실 메시아(사마리아인들은 메시아를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돌아오실 분으로 알고 있었다.)에 대해 말했다. 그녀에게 나는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사람)입니다.” 그녀는 마을로 달려가서 이웃 사람들에게 자신이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했다. 곧 사람들이 나를 보려고 몰려왔다.

 

그 사이 나의 제자들이 돌아왔다. 제자들이 나에게 빵을 건네주었을 때, 나를 살리는 음식은 나를 보내신 그분의 뜻을 행하고 이루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면서 나는 요한세례자 가 뿌린 씨를 추수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그 여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복음 전파에 있어 나의 첫 일꾼인 셈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통해 분명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나는 그들에게서 이틀을 더 보냈다. 결국 사람들은 나를 두고 “정말 이분이 세상의 구원자이시다.”하고 말하였다.

 

이제 갈릴래아의 가나로 갔다. 가파르나움에서 온 어떤 왕궁 관리가 서둘러 와서 심하게 앓고 있는 자기 아들을 낫게 해 달라고 애걸했다. 나는 그의 아들이 나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가 내 말을 듣고 가는 도중에 그의 아들은 정말로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것은 가나의 혼인잔치에 이은 두 번째 표징이었다.

 

예수님의 자기 계시 : 2단계(요한5-10장)

 

안식일의 치유 (요한 5,1-47)

얼마 후 나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논쟁에 휘말렸다. 지금까지는 순조롭게 내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급박하게 변화되었다. 예루살렘의 베짜타못에서 38년 동안이나 수족을 못 쓴 사람이 나에게 왔다. 그는 오랫동안 못 옆에서 치유를 위해 기다렸지만 허사였다. 내가 그를 치유해주자, 그는 침상을 걷어들고 걸어서 나갔다. 때는 안식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유다인들은 그가 그의 침상을 걷어들고 가는 것을 - 짐을 나르는 노동 - 안식일의 규정을 어긴 것으로 여기고 즉시 반발했다.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분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랬다고 변명했다. 그 뒤 성전에서 그를 만난 나는 치유를 받았으므로 이제는 죄를 짓지 말라고 권했다. 그는 가서 치유를 해 준 이가 바로 나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안식일을 문제 삼아 나를 몰아내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당신들은 모세의 율법에 충실하다고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당신들은 나를 죽이려고 한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처사가 아니다. 당신들은 내가 안식일에 사람을 고쳤다는 이유로 나를 죽이려고 한다. 당신들은 왜 안식일에 노동에 해당되는 할례를 베푸는가? 당신들은 위선 투성이다.”(요한7,19-24)라고 대응했다.

 

아들로서 나는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만을 행한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이 하시는 모든 것을 나에게 가르쳐주시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당신이 생명을 주실 수 있는 것처럼 나도 생명을 줄 수 있다. 또 당신이 심판하시니 나도 심판할 수 있다. 아들을 공경하는 것은 곧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다. 내 말을 듣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말을 듣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안식일이라도 나는 치유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이 격분했다. 그들은 내가 안식일 규정을 모독했다고 보았으며, 더구나 하느님과 같다고 처신했던 것으로 여겼다. 이른바 불가침의 영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다고 내가 거듭 말했다. 생명을 주는 권능을 나에게 나누어 주셨다. 나아가 나는 율법이 요구한 대로 ‘두세 사람의 증인’을 들었다. 아버지께서는 요한 세례자의 증언을 통해 나를 증거해주셨다. 그러면 내 일은 아버지께서 나를 통해 이루시는 것이므로 나를 증거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가 나를 증거했다. 유다인들은 성서에 대한 지식에 자부심을 가졌지만, 그 자부심이 오히려 파멸의 원인이 되었다. 그들의 불신이 잘못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지도, 하느님께 응답하지도, 하느님의 관심사에 봉사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심사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고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희망을 두고 있었던 모세가 그들을 고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정말 모세를 이해했더라면 모세가 나를 두고 쓴 글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들은 모세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의 변호자가 되어야 할 모세가 오히려 그들을 고발하는 고발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