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식은 하늘이 준다.” 나는 배가 불룩 나온 임산부를 보면 뱃속의 느낌이 어떤지 궁금했다. 아이와 엄마가 다정하게 손잡은 모습을 보면 나도 그 행복을 느껴보고 싶었다. 결혼 후 처음 맞는 봄, 먹은 것이 체한 것 같더니 온몸에 한기가 들고 입맛이 없었다. 달거리처럼 속옷에 조금씩 비친 핏물이 멈추질 않아 병원에 갔다. 의사는 “좋은 소식부터 들을래요? 나쁜 소식부터 들을래요?”라고 물었다. 좋은 소식부터 듣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임신이긴 한데 자궁에 종양이 있어 수술을 해야 합니다.”라며 종합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입원수속을 해놓고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는데 한밤중에 갑자기 배가 끊어질 듯이 아프더니 분비물이 확 쏟아졌다. 급하게 병원 응급실로 가서 초음파 검사를 했더니 나의 뱃속은 텅 비어 있었다. 나와 연결되어 있던 생명은 이미 인연을 끊고 먼 곳으로 간 뒤였다. 며칠 동안 가졌던 희망은 갑자기 몰아친 태풍에 사라져버렸고, 마치 잠깐 꿈을 꾼 것 같았다.
시간은 아픔을 잊게 하는 약이었다. 찬바람이 온몸을 감싸는 겨울날, 몸은 새로운 잉태의 신호를 보내왔다. 정기적인 검사를 받던 어느 날,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아 3일 간격으로 계속 진찰한 결과 괴리유산이 되었다고 했다. 8남매인 나는 결혼을 하면 아이는 당연히 생기는 것으로 생각해왔는데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 자식을 갖는 것이 은총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아이를 갖지 못한 죄의식으로 ‘사람의 손으로 안 되는 것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수술대에 올랐다. 길에서 임산부가 지나가면 ‘나는 언제 저런 불룩한 배를 만들어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마냥 부러웠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마저도 내게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들렸다.
해가 바뀌어도 소식이 없자 주위에서는 진찰을 받아보라고 했고 두려웠던 나는 결국 고삐 잡힌 소처럼 병원에 갔다. 진찰 후 의사선생님께서 “나팔관이 둘 다 막혀 있고 나이도 있으니 서둘러 시험관 시술을 하라.”고 권유하면서도 내 나이가 30대 중반을 넘어서고 남편은 40대 초반이라 걱정하셨다. 남편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싫다며 처음에는 반대를 했다. 남편과의 갈등과 아기를 낳고 싶다는 간절함이 내 안에서 헝클어진 실타래로 남았다. 내가 힘들어 하는 모습에 마음 아파하던 남편은 결국 시험관 시술에 동의했다.
1차 시험관 시술은 잘 되었다. 두 달 동안 남편과 나는 번갈아가며 내 엉덩이에 호르몬주사를 놓았다. 엉덩이에 멍울이 생기고 더 이상 주사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힘들어 눈물을 흘렸다. 눈물의 자리에 조금씩 새 생명이 자리를 잡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초음파 검사를 통해 들리는 심장박동소리는 새로운 희망의 싹이 뱃속에 있다는 사실에 나를 행복하게 했다. 매일 아침, 눈뜨자마자 가장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묵주기도를 했다. 성경을 읽으며 희망의 씨앗과 대화를 나누며 날이 갈수록 가슴이 벅찰 만큼 행복했다. 하느님과 성모님께 더욱 열심히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12월 3일 밤, 갑자기 골반의 통증이 심해지더니 배가 단단하게 뭉치고 창자가 끊어질 듯 아팠다. 그렇게 소중한 선물은 또다시 사라졌다. 나는 통곡을 했다. ‘이건 아닌데, 이럴 순 없어! 얼마나 정성을 담고, 매순간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조심했는데….’ 하지만 운명으로 돌리기엔 너무 슬펐다.
난 왜 자식을 품을 수 없는지 내 자신이 싫고 미웠다. 아이와 나와의 소중한 인연은 한순간 구름이 되어 사라졌다. 나는 입원실에서 남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성통곡을 했다. 집에 와서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또 울었다. 더이상 삶에 대한 희망도 없었다. 너무 억울한 마음에 생명을 부여한 신을 원망하며 등을 돌렸다. 세례를 받은 지 20년이 넘도록 주일을 어겨본 적도 없고 남에게 악하게 한 적도 없었다. 미혼 때는 일주일에 두 번씩 새벽미사 해설과 독서를 하고 공동체에 봉사도 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하느님은 나의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내가 믿었던 하느님이 원망스럽고 미웠다. 주일이 다가오면 마음이 불편했지만 불신과 원망이 높아질수록 주일에 대한 감정도 무뎌졌다. 그래서 하느님께 반기를 들었다. 모든 성물과 성경을 상자에 넣고 내 마음과 함께 봉해버렸다. 레지오 단원들이 전화를 하고 가정방문을 와도 냉정하게 돌려보냈다. 나에게는 더 이상 하느님이 없다고, 믿지 않겠다고 했다.
시간이 갈수록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로 낙인 받는 것이 두렵고 싫었다. 길에서 산모가 지나가면 차마 바라보지도 못하고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주위 사람들도 내 앞에서는 아이와 임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점점 더 어둠 속으로 숨었다. 남편에게 미안해서 이혼을 하자고 했다. 남편은 처음부터 시험관 시술을 내켜하지 않았지만 내가 상처 받을까봐 동의해 주었고 이제는 입양을 하면 된다고 했다. 위로하는 남편이 고마웠지만 시댁에 가면 죄인이 된 것 같아서 늘 마음이 불편했다. 아이를 낳는 것이 평생 소원이라며 남편에게 한 번만 더 시험관 시술을 하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다시 시작한 시험관 시술도 괴리유산이 되었고 경제적, 정신적 부담은 부메랑이 되어 내 가슴에 큰 옹이를 하나 더 가져다 주었다. 실패하는 횟수만큼 생명을 품지 못한 죄의식은 그물처럼 온몸을 꽁꽁 옭아매어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TV에서 길거리나 화장실에 버려진 아기에 대한 뉴스가 나오면 ‘우리 집 앞에 두고 가면 잘 키울 텐데….’하는 생각과 함께 막연한 기다림도 있었다. 골목 구석에 뒹굴고 있는 쓸모없는 낙엽이 나처럼 보였다. 여성의 특권을 잃어버린 석녀의 슬픔은 처절하고 불안하고 답답했다. 철저한 고통 속에 기적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마태오 복음 7장 7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는 말씀이 귓가를 스치며 닫힌 마음이 열렸다. 부족한 정성을 담아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매일 두 손을 들고 묵주의 9일 기도를 했다. 처음엔 팔도 저리고 힘들었지만 어느 순간 기도드리는 3시간 동안 예수님이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온 정성을 다해 기도드리다 보니 어느새 6시간 동안 나는 손을 들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저린 발은 하느님께서 풀어 주셨고, 무거운 손은 성모님과 예수님이 같이 들어 주시며 고통과 상처 속에 늘 함께 해주셨다. 기도가 끝나면 온 몸은 땀과 눈물로 젖었지만 신기하게 팔은 아프지 않고 오히려 가뿐했다. 특별한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기도와 말씀에만 몰입하였다. 9일 기도가 끝나면 또다시 청원,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아이들과 고통 받는 이들을 함께 봉헌했다. 또한 성령쇄신봉사회에 나가서 계속해서 회개와 용서의 기도를 드렸다.
가을 햇살이 낙엽에 모자이크 수를 놓을 무렵, 음식냄새에 속이 불편했다. 시험관 시술을 하지 않았기에 임신일 리 없고 상상임신을 한 것 같았다. 한 달이 지나도 증상이 없어지지 않고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지만 병원에 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다가 큰 마음을 먹고 혼자서 몰래 병원에 갔는데 드디어 죽은 것 같았던 고목나무에 작은 움이 텄다. 옹이의 상처가 두덕두덕 끝난 곳에 간절한 희망이 나의 손을 잡았다. 믿기지 않았지만 분명 아름답고 맑은 생명이 심장박동을 울리며 내 몸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하느님이 나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 주셨다. 혹시 누가 시기라도 할까봐 남편과 나만 알고 있기로 하고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며 태명을 ‘은총’이라고 지었다. ‘절대안정’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두문불출하고 은총이와 함께 열 달을 누워서 외줄타기처럼 아슬아슬한 날들을 보냈다. 뱃속에서 꼼지락거리던 첫 태동의 가슴 벅찬 감동으로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입덧이 너무 심해 겨우 과일만 먹을 수 있었고 변비가 심했지만 누워서 성경을 읽고 묵주기도를 드리며 열심히 태교를 했다. 그렇게 신·구약성경을 다 읽을 때쯤 그동안 부러운 눈으로 남몰래 훔쳐보던 임산부의 배처럼 내 모습도 은총이의 샘물로 조금씩 보름달로 여물어져 갔다. 태동이 차츰 커지면서 배를 발로 차고 머리가 손에 만져질 때면 정말 신비로웠다. 출산예정일이 다가오면서 신부님께 고해성사와 축복을 받으며 마지막 출산준비를 했다. 뱃속의 샘물은 시냇물이 되어 흐르다가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어 보름달과 맞닿았다. 지구가 우주를 돌듯, 하늘이 빙글빙글 돌아 감각의 문을 통과했다. 희망과 꿈을 주고 기쁨이 생기며 행복한 은총의 공주 한 그루가 심어졌다. 처절한 아픔은 마흔의 나이에 나를 어머니로 변신시켰다. ‘엄마’라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로 지난 날의 상처와 아픔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은총이가 유아세례를 받자 신부님과 주위 분들이 “기도해서 아들을 하나 더 낳으라.”고 하셨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고 감사했지만 ‘그래도 주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받겠습니다.’하고청원기도와 감사기도를 계속 드렸다.
봄이 오자 고목나무에 또다시 축복의 싹이 움텄다. 이번에는 주님의 축복이라며 태명을 ‘축복’이라고 지었다. 은총이가 방실방실 웃으며 집안에 꽃을 피우고, 축복이의 봉오리도 점점 여물어 튼실한 열매가 달렸다. 추석 가까이에 여물어진 보름달을 축복의 왕자로 비웠다. 두 아이는 병치레가 잦았지만 나는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은총이의 열이 내리면 축복이가 열이 나고 번갈아 가면서 아팠다. 잠을 자는 날보다 밤을 꼬박 새우는 날이 더 많았다. 특히 우유 알레르기가 있는 은총이는 우유를 먹지 못해 더욱 힘이 들었다. 그러나 장애가 있어도 괜찮으니 제발 아이 한 명만 달라고 밤새워 기도한 지난 날을 되돌아보면 병원에 데리고 갈 수 있는 아이가 있어 행복했다. 그야말로 고통없이 이루지는 것은 없었다.
은총이가 유치원에 들어가자 신부님과 수녀님, 총회장님은 자동차에 자리가 하나 비었다며 아이를 한 명 더 낳으라고 하셨다. “지금도 행복하고 감사하며 나이가 마흔 중반이라 힘들다.”며 손사래치는 나에게 본당 신부님께서는 “그래도 주시면 낳아야지.”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은총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는데 갑자기 반시가 먹고 싶었다. 평소에 먹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데 그날따라 너무 먹고 싶어서 남편과 반시를 사러 이곳저곳으로 찾아다녔다. 그리고 보니 달거리가 없었다. 남편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마흔 넷인 나와 마흔 여덟인 남편은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힘이 들었다. 나는 ‘분명 하느님의 뜻일 것’이라며 감사와 흔들리는 마음을 봉헌했지만 남편은 며칠 동안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솔직히 적은 월급으로 시댁 생활비와 우리 다섯 가족의 생활은 무리였다. 옛말에 ‘자기 먹을 것은 타고난다.’고 하지만 현실은 열악했다. 그러나 분명 하느님의 뜻이며 주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라는 말씀 같아 태명을 ‘영광’이라고 지었다. 은총이와 축복이 때문에 성경읽기가 쉽지 않았지만 태교를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었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희망의 꿈을 품으며 추위에 흔들릴 때 반질반질한 홍시같은 얼굴을 한 영광의 왕자가 고목나무의 긴 터널을 뚫고 세상에 태어났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아이 셋을 자연분만으로 출산했으니 자식은 정말 하늘이 주는 선물이다. 고통없이 태어나는 생명은 없다. 신은 고통 속에 더 풍성한 사랑을 주셨다. 볼품없는 고목나무에 탐스럽게 달린 열매는 아름답다. 할머니 같은 엄마를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세 아이가 있어서 나는 너무 감사하다. 은총이가 처음 복사서던 날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누나를 따라 축복이도 자연스럽게 복사를 서게 되어 어떤 날에는 나는 미사안내를, 아이들은 복사를 섰다. 본당에서 나는 미사안내와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있으며, 두 아이들은 미사안내와 반주, 복사를 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은총이는 벌써 중학생이 되었고, 축복이는 6학년, 막내 영광이는 이제 첫 영성체반에 들어간다. 특히 축복이는 성격이 밝고 활동적이라 본당 신부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고 있다.
하늘이 주는 선물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식이다. 소중한 보물들이 있어 우리집은 항상 시끌벅적하다. 성모님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따뜻한 품으로 우리를 안아주시고 생명이신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축복하신다. 고목나무의 열매들은 기름진 옥토는 아니지만 지금도 사랑의 향기를 뿜으며 꿈을 향해 달려간다.
* 9월 호에는 가작 수상자 정은희(요안나, 다사성당) 씨의 작품이 실립니다.(가나다 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