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예의 바르다. 공부도 잘한다. 말도 예쁘게 하고, 복장도 바르고, 가족 관계도 원만하다.” - 모범생을 두고 하는 말로,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는 아이들을 말한다. “혼자 조용히 책을 본다. 조용하다 못해 있는 듯 없는 듯하다. 수업시간에 별로 질문도 하지 않는다.” - 이 경우는 평범하게 학교생활을 하면서 특별한 문제없이 잘 지내는 아이들이다. “튄다. 수업과 조금은 거리가 먼 엉뚱한 질문도 많이 한다. 방학 때 하고 다니던 염색이 아직 지워지지 않아 머리가 얼룩덜룩하다. 귀에는 귀걸이를 한 자국이 선명하다. 교복 치마를 줄여서 터질 것 같다. 말투가 너무 공격적이어서 상대가 당황할 때가 있다. 아이들도 무서워하고 선생님도 버거운 상대들이다.” - 흔히들 말하는 부적응 아이들이다.
사실 학교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을 이렇게 저렇게 단정지어 구분한다는 자체가 어려운 일이고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나의 주관적인 견해로 볼 때 위에 열거한 부류의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아이들, 특히 청소년기의 아이들은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강한 개성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런 여러 개성의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아이들은 역시 사랑을 먹고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과 관심을 바라는 아이들은?
소위 모범생이라고 불리는 아이들은 가만히 놔두어도 무엇이든 잘 하고, 잘 할 수 있는 용기도 있고 자신감도 있다. 그들에게는 선생님들의 사랑과 관심이 특별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아이에게 더 관심이 가고 수업시간에 눈길이 더 간다. 무엇을 조금 잘못하거나 실수를 해도, 귀엽게 보이고 관용이 생기고 용서가 된다. 솔직히 신부인 나 자신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 항상 똑같이 같은 모습으로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다. 물론 평범하게 자기 할 일 잘하고, 특별히 자기가 드러나지 않아도 되고, 또 선생님의 관심도 별로인 아이들 역시 가만히 놔두어도 학교생활을 잘 해나간다.
그런데 정말 사랑 받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있다. 스스로 피해의식을 많이 갖고는 있지만, 관심을 끌고 싶어한다. 그래서 더욱 이상한 행동을 하고, 말을 할 때도 공격적으로 하게 되고, 눈빛도 무서우며 수업시간에는 엉뚱한 질문을 하거나 아예 딴 행동을 하거나 잠을 자 버린다. 이 아이들이 왜 이럴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 좀 알아주세요.”, “나도 공부 잘하는 애들이랑 똑 같이 대해 주세요.”라는 자기식의 표현이란 것을 알게 된다.
사랑에 목말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특이하다. 한번은 복도를 지나가는데 내 옆구리를 쿡 찌르고 달아나는 아이가 있었다. 어떤 아이는 만날 때마다 사탕을 주거나 자기 사진도 보여주는 등 이것저것 말도 걸어온다. 그렇다고 특별한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반면 어떤 아이는 말끝마다 반항적이다. 선생님들이 자기만 미워한다고 한다. 그리고 변두리에서 빙빙 돌면서 정면에는 나타나지도 않는다. 자기들끼리 무리지어 세력을 행세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래서 선생님들에게 이런 아이들 아느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웃으면서 그 애들은 관심 끌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라고 한다. 또 집에서 사랑을 못 받았기 때문에 학교에서 선생님들께 사랑받고 싶어서 그런 모습들을 보인다는 것이다. 모범생이라고 하는 아이들이나 부적응 학생이라고 하는 아이들이나 그들 모두의 공통점은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단지 긍정적으로 표현하거나 부정적으로 표현될 뿐, 똑같이 사랑을 원하는 아이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아이들은 스펀지이다
‘아이들은 스펀지’라고 비유하고 싶다. 물을 부으면 그대로 스며드는 스펀지처럼 아이들에게 사랑을 쏟아 부으면 부은 만큼 그대로 다 받아들인다. 특히 사랑에 목말라 하는 아이들에게는 그 사랑의 물이 생명수로 변화된다. 선생님들이 자기만 미워한다고 생각해서 자꾸 옆길로 가는 아이들과 얘기를 해보면 그렇게 순진하고 예쁠 수가 없다.
나는 때때로 그런 아이들을 교목실로 부른다. 어떤 때는 그들 스스로가 찾아오는 아이들도 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나와의 신뢰 관계가 형성되고부터는 아주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자기들이 그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온갖 얘기들을 스스럼없이 하게 된다. 친구들과 술 마시고 담배 피며 싸운 얘기들, 선생님들이 왜 싫은지, 학교가 왜 싫은지, 또 집에 들어가기 싫은 이유 등등 한번 쏟아 놓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때론 욕도 섞어가며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선생님들께 억울하게 맞았던 것을 호소한다.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이 아이들이 그동안 얼마나 자기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또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말을 하고 싶어도 무서워서 못하고, 야단 맞을까봐 못하고, 자기들을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망설이기만 했던 아이들이다.
분명한 것은 이 아이들도 선생님과 웃으면서 얘기하고 싶고, 따뜻한 눈길과 다정한 말과 손길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의 선입견으로 볼 때 학교에서 원하는 모범생의 기준에 다다르지 못하니까 아이들 스스로 먼저 다가가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언제나 변두리에서 주변인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절대로 먼저 다가오지 않는다. 그들에겐 그만한 용기와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가까이 오려고 시도를 해도 자기마음과는 다르게 특이하게 또는 삐딱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그런 감정들에 더 익숙해져 있고 그것이 더 편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런 아이들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 때론 교목실에서 먹을 것도 주고, 그들이 원하는 자세로 앉거나 기대거나 편한 대로 하라고 일러준다. 또 학교 한쪽에 몰려 있으면 찾아가서 일부러 같이 놀아 보기도 한다. 하지만 처음에는 아이들이 경계심을 갖고 나를 튕겨 버린다. 내가 간 것이 정말 미안하고 어색하도록 만들어버리고 왕따가 된 기분을 들게 한다. 그렇지만 한번 두번 자기들을 이해하고 관심을 갖고 얘기를 들어주며 함께 맞장구를 치면서 공감을 해주면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내가 다가간 만큼 나는 그들 세계에 흡수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때 그들은 스펀지가 되어 교사의 사랑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아이들은 진정으로 사랑을 주면 주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교사와 부모들도 스펀지가 되자
스펀지는 물을 흡수하는 능력도 있지만 충격을 완화시키는 작용도 한다. 따라서 교사나 부모는 그 완충 역할을 해야 한다. 아이들이 치고 나오면 받아줘야 한다. 내가 강한 바위가 되어 딱딱하게 튕겨 버리면 그들은 또 어디로, 어떻게 튕겨 나갈지 모른다. 그들이 깨어지지 않도록 안아주고 감싸주어야 한다. 그래서 다시 제자리를 찾도록 하는 것이 다듬어지지 않은 그들을 다듬어가는 인성교육이고 사랑일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우리의 속은 다 타들어 갈 수도 있고, 자존심도 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겐 자기들이 부딪혀도 깨어지지 않는 스펀지가 필요하다. 누가 할 것인가? 바로 교사와 부모와 사회의 어른들이 함께 해야 할 당연한 몫이다. 우리도 그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받아주셨기 때문이다. 나의 약점, 나의 잘못, 나의 죄를 다 안아 주셨고 품어 주셨기에 그렇게 해야 한다. 병들어 고통 받고, 가난해서 소외되고, 죄지어 죽을 운명에 처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먼저 다가가셔서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시고 안아주시면서 용기와 희망을 주셨다. 그리고 당신에게 창을 내밀고 못을 박는 이들까지도 품어 주셨다. 그렇게 몸소 사랑을 실천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용서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셨다.
이제 우리는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실천해야 한다. 나는 그것을 ‘스펀지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에게는 그럴 만한 분명한 이유가 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있고, 자격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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