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고지전’을 보던 저는 잠깐 스쳐가는 장면 속에서 제가 담임을 맡았던 학생 한 명의 얼굴을 발견하였습니다. 기쁜 마음에 영화가 끝나자마자 전화를 걸었더니 어떻게 알아 봤냐며, 아직은 멀었다며, 그래도 감사하다고 좋아했습니다. 그 뒤로 TV 드라마에도 한 번씩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더니 요즘은 여러 드라마에서 짧은 분량의 단역이지만 대사도 길어졌고, 나오는 장면도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드라마 훑어보기를 자주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발견할 때마다 가슴 한 쪽이 두근두근 설렙니다. 연예인이나 드라마는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는데 이젠 제게 무척 가깝고, 관심 가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드라마 훑어보기를 하던 중 최근 ‘여왕의 교실’이라는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다가 대사 하나가 날카로운 화살촉이 되어 제 마음속 과녁에 제대로 꽂혔습니다.
“공부는 해야 하는 것이 아니야. 공부는 하게 되는 거야.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가 무언가를 배우고 익혀나가게 되는 게 공부야. (중략) 모든 인간이 가진 세상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 그 호기심을 풀어가는 과정이 공부야. 공부는 하기 싫은 의무쯤으로 생각하지만 공부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야.”
20년 가까운 시간을 교단에 섰지만 저는 솔직히 이렇게 명쾌한 답으로 학생들에게 공부를 정의 내려준 적이 없습니다. 이 장면을 보며 저는 지나간 시간 속에서 왜 공부를 해야 하냐며 하소연하고 힘들어 했던 아이들의 얼굴이 제 뇌리를 고통스럽게 스쳐갔습니다. 그리고 전 그 주말을 온통 ‘여왕의 교실’과 함께 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독하고 매서운 말로 학생들을 대하고, 학급의 문제를 제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들로 풀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뭐 이런 드라마가 있어?, 이런 선생이 어디 있어?”라고 반문하면서 끝까지 봤습니다. 하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교사인 제게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하는 드라마였습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통해 평소 징그러운 외모 때문에 외면해왔던 굼벵이가 흙 속에서 꿈을 키우며 자기 껍질을 벗기 위해 애쓰고 있는 귀한 가르침을 주는 생물임을 처음 알았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굼벵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허물을 벗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잠시 흙 속에 묻혀 있는 것이라며, 못생긴 굼벵이도 영원히 굼벵이가 아니라 언젠가 풍뎅이가 될 수도 있고, 천연 기념물인 장수하늘소가 될 수도 있다는 대사를 들으며 지금의 우리 반 아이들 하나하나가 꿈꾸는 굼벵이가 되어 제 가슴팍으로 파고 들어 왔습니다. 저는 그날 밤 새벽이 다 되도록 학기 초 우리 반 아이들이 A4 용지 2쪽에 쓴 자기소개서를 소중히 읽고 또 읽었습니다. 어느 때는 느려 터져 지켜보는 사람들을 답답하게 하고, 아무리 말해도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것 같아 속을 썩이지만, 껍질 속에서 조금씩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살아있는 굼벵이들, 자신의 허물을 벗고 새로운 자신만의 모습으로 세상을 준비하는 우리 반 아이들이 그 긴 밤 제 안에서 꼼지락 꼼지락 살아 움직여 마냥 행복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오늘 너희들에게 주어진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마. 꿈이 없다고? 뭐가 될지 모르겠다고? 그럼 13살 6학년 지금 할 수 있고 하고 싶고 해야 하는 일들에 최선을 다해. 틀려도 괜찮아. 실패해도 괜찮아. 오늘의 시간마다 최선을 다 하다 보면 너희들을 알게 될 거고, 내일의 꿈이 보이기 시작할 거야.”
드라마가 마지막 회를 향해 치닫고 있을 때 저는 이 대사를 들으며 7월 중순에 제게 온 문자 한 통이 생각났습니다. 무척 기다리던 소식을 담은 반가운 문자라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저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 문자 화면을 보여주며 큰 소리로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그 문자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생님, 저 이번에 임용 최종합격 되어 소식 전해드립니다. 그동안 걱정끼쳐 드려 죄송했고, 선생님께서 격려해 주시는 말씀 하나하나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저도 꼭 좋은 선생님이 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졸업생들이 보내는 보통의 감사 문자인데, 무엇이 그리 기쁘냐고 묻고 싶으시죠? 이 학생은 대부분의 학부모나 학생들이 선망하는 고려대학교에 합격했습니다. 동시에 대구대 초등특수교육학과에도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은 주변 사람들의 기대와 소망을 뒤로 한 채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학기 초 진로상담을 하면서 제가 서울대에 동시에 합격해도 이 과를 가겠느냐고 물었을 때, 이 학생은 그래도 자기 꿈대로 간다며 단호한 어조로 제게 답했습니다. 그래서 전 아들을 설득해 달라고 저를 찾아오신 부모님께 용감하게도 “아드님의 꿈입니다. 신념입니다. 자신의 인생인데, 믿고 맡겨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며 끝내 부모님을 설득했습니다. 어쩌면 무모할 수도 있는 결정을 내린 저였기에 졸업 후에도 늘 이 아이의 미래가 궁금했고, 꼭 소망대로 살기를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이 아이가 제게 보내 온 문자 내용은 합격의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아직은 자신이 준비가 덜 되었는지 떨어졌다며, 그래서 더 열심히 노력해 좋은 교사가 될 것이니 1년만 기다려 달라는 문자를 받고 그날은 온통 가슴 아픔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1년 뒤, 좋은 소식을 기대하던 제게 날아온 것은 여전히 불합격 소식이었습니다. 그대로 있을 수 없어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만난 이 멋진 남자는 제게 여유있는 웃음과 변함없는 의지로 오히려 제게 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기다린 만큼 더 소중하지 않겠느냐며, 한 번도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다는 이 아이의 말을 들으며, 전 하느님께 한 마디 큰소리를 내 봤습니다. “이런 아이가 교사가 안 되면 누가 되어야 하나요?”
하지만 하느님도 아시고, 이 아이도 알고 있었는데 저만 조급했나 봅니다. 저는 오늘 이 아이가 무척 보고 싶습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마음 졸이며 기다렸던 것들에 대한 미안함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굼벵이 이야기도 나누고 싶습니다. 느려 터지기만 해서 속담에서조차 부정적 의미로 쓰이는 굼벵이가 사실은 그 껍질 속에서 완전한 탈피를 꿈꾸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음을, 너 또한 그 속에서 나온 천연기념물인 장수하늘소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드라마 끝 장면에서 해임되어 자신들의 졸업식장에 서지 못한, 그렇게 미워했던 담임선생님께 아이들은 보고 싶었다, 함께 하고 싶다, 고맙다며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태연히 뒤돌아서 교실 문을 나서는 선생님의 등을 향해 아이들은 마음으로 “스승의 은혜”를 부릅니다. 그 순간 스승의 은혜는 졸업식 날 정말 어울리는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졸업식 날 그 노래를 들을 때 부끄럽지 않은 교사가 되도록 제 자신을 채찍질하겠다, 결심도 했습니다. 모든 어른들께 부탁드립니다. 굼벵이들의 꿈을 지켜봐 줄 수 있는 여유와 믿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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