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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해 및 월간 〈빛〉 30주년 기념 신앙수기공모전 가작 수상작 ②
감사합니다


정은희(요안나)|다사성당

제가 성당 문턱을 넘어 예비신자 교리를 받은 지는 참 오래 되었습니다. 스무 살 갓 넘어 친구를 따라 가게 된 성당, 그 친구 또한 냉담한 시간이 길어 함께 예비신자 교리공부를 하면서 주일이면 미사에 같이 참석하곤 했습니다. 얼굴에 잡티 하나 없으시고 단아한 모습의 수녀님으로부터 난생 처음 배우던 교리와 한 소절씩 따라 불렀던 성가가 참 좋았다는 기억이 제 안에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의 미사는 미사예절조차 몰라서인지 그 넓은 삼덕성당의 귀퉁이 의자에 앉아 얼마나 졸았는지 모릅니다. 6개월 동안 교리공부를 했지만 저는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아니 받지 못했습니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음을 주님은 알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친구와 멀어지면서 성당 역시 소홀히 하게 되었고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뒤 직장을 다니면서 결혼을 하여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제 주위에는 항상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전하는 하느님 얘기를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었지요.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스무 살때 잠깐 다녔던 성당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다시 다녀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아파트 바로 앞에 성당이 들어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했던 빨간 벽돌의 성당건물이 아닌 가건물로 지어졌고 여러 개의 컨테이너로 이어져 있는 회합실과 식당, 마당에 성모상까지 갖춘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베란다에 나서면 너무나 환히 내려다보이는 성당 구석구석의 모습과 주일이면 미사를 드리러 오시는 분들의 모습, 그리고 항상 거기 계시는 성모님까지 저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쭈뼛쭈뼛 예비신자 교리반을 찾아가서 주변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드디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타 본당에서 축하해주러 오신 분이 레지오마리애활동도 같이 해야 한다며 쁘레시디움까지 결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직장생활에, 가족이 같이 하지 않으니 주일미사는 빠지기 일쑤였고, 레지오 회합 역시 결석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남편과 아이들도 같이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 노래를 잘 하는 남편이 성가대 활동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남편에게 이야기를 건네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가정에 너무나 힘든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들의 교통사고, 제가 운전하고 시부모님과 같이 설 준비를 하러 가던 중 난 사고였습니다. 중앙선을 넘어 온 차가 뒷좌석 쪽을 추돌하는 바람에 운전석 뒷자리에 앉아있던 아들은 차창에 머리를 부딪쳐 얼굴이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는 아들은 수술도 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라는 숨골 근처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산소호흡기와 맥박 체크기를 달고 축 늘어져 그저 숨만 쉬고 있는 아들,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저의 잘못이라고, 제 잘못 때문이라고 크게 자책을 하며 하느님께 ‘제발 우리 아들을 데려가지 말아주세요. 아직은 안 됩니다, 하느님!’이라고 울부짖으며 매일매일 매달리듯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살려만 달라고, 그저 제 품에 있게만, 그저 내손으로 보듬을 수만 있게 해 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병원에서는 자가호흡이 힘들어 몸에 열이 나기 때문에 열을 낮추기 위해 기관절개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추운 2월에 아들은 탈의한 상태에서 선풍기로 열을 식혀야 했습니다. 추운지 더운지도 모르고 누워 있는 아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하루 세 번씩 면회하면서 이름을 불러 주고 쳐다보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소식을 전해 듣고 오신 본당의 여러 교우분들은 제 손에 성수를 꼭 쥐어주시며 묵주를 건네주고 가셨습니다. 제가 기댈 곳은 남편도 부모도 아니었습니다. 평소 레지오를 하면서도 묵주기도조차 잘 하지 않았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서툰 기도뿐이었습니다.

중환자실 앞에서 묵주알이 짓눌리도록 한 알 한 알에 힘을 주어 기도를 했습니다. 3일째 되던 날 본당의 예비신자 교리봉사를 해 주셨던 유스티나 자매님이 중환자실에 있는 아들에게 대세를 받게 하라고 전화를 하셨습니다. ‘대세’란 말에 처음엔 짧은 지식으로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습니다. 하지만 대세로 본명을 정해주고 기도를 올리고자 하는 뜻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대세를 받기로 하고 병원의 원목실 수녀님께서 중환자실로 들어가셔서 세례를 주신 바로 그날, 우리 바오로가 눈을 떴습니다. 며칠 동안의 깊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몸은 아직 만신창이고 찢겨진 귀에는 붕대가 감겨있고,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지만 엄마, 아빠를 알아본다고 발가락을 까딱였습니다.

주님께서 바오로 곁에 계셨나 봅니다. 남편은 아직도 그 날을 기억하며 이야기 하곤 합니다. 중환자실 앞의 복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 바오로를 위하여 기도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본당의 학생부 교리 선생님은 기도는 간절해야 한다며 몇 시간이고 그 자리에 서서 기도해 주셨다고 합니다. 바오로가 보름이 넘도록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저는 병원에 있는 어두컴컴한 성당의 제대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죄인인 것 같아서 감히 의자에 앉을 수가 없었던 저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며 그저 넋 놓고 울기도 했습니다. 2월의 찬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어도 성모님 앞에 서야만 했습니다. 제 서툰 기도로라도 기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당신 앞에서 마음껏 울 수 있도록, 기댈 수 있도록 먼저 자녀로 만들어 주시고 자리를 내어 주셨나 봅니다. 남편 또한 아무도 시키지 않았건만 성모님 앞에서, 성가정상 앞에서 저와 함께 기도하고 매일 십자가의 길을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성가정상 앞에서 바오로가 집에 돌아가는 날 성가정을 이루겠다고 약속했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차츰 차도를 보이면서 중환자실에서 나왔으나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서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옮겨가야 했습니다. 우리 부부와 아들은 서울과 경기도 일대의 여러 병원을 2년 동안 떠돌아 다녔습니다. 우리는 가는 병원마다 성당을 찾았고 마지막 1년은 경기도 분당에 있는 재활병원에서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 수녀님께서 남편과 대세만 받았던 아들에게 교리공부를 시키시고 2011년에 세례를 받게 해 주셨습니다. 할머니들이 손자를 대하듯 꼭꼭 숨겨두신 빵과 과자를 챙겨 바오로에게 주셨고, 미사시간이면 항상 우리 가족을 먼저 챙겨 주시던 그 할머니 수녀님, 성가를 너무나 멋지게 불러 주셔서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미사시간을 기다리게 했던 왕년에 가수였던 안나 할머니는 바오로가 작은 목소리지만 띄엄띄엄 성가를 따라 부르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봉사하시던, 본명도 모르는 어느 자매님께서는 퇴원한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저녁에 다시 오셔서 “바오로, 따뜻하게 입어.” 하시며 외투를 선물로 주시고는 몇 번이나 돌아보며 인사를 하고 가셨습니다.

헤어지면 앞으로 다시 보기도 힘든 이들인데 그들로부터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우리는 아무런 보답도 하지 못한 채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2년이 넘도록 이모랑 할머니랑 지냈던 우리 딸은 사춘기라서 고분고분하지 않았을 텐데도 혼자서 6개월 동안의 예비신자 교리반을 거쳐 세례를 받아 우리 가족은 남편이 성가정상 앞에서 감히 약속했던 그 성가정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남편에게 요셉이라는 본명은 참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저희 가정, 특히 저를 잘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남편은 지난해 40일동안 새벽 미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더니 올해도 역시 힘들어 하면서도 아침 5시면 일어나서 씻고 집을 나섭니다. 우리 아들 바오로가 아직은 재활치료로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너무나 많은 이들이 바오로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사랑해주셔서 바오로가 혼자서 걷는 날이 곧 올 것이라 믿습니다. 3월에는 한 학년 쉬긴 했지만 바오로가 5학년으로 학교생활을 합니다. 학교의 급식이 먹고 싶다고 했는데 그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를 전해야 할 이들이 너무나 많고 진심을 담아 전하고 싶은데 몇 마디의 말로 전달하기엔 너무나 죄송해서 이렇게나마 적어 봅니다. 병원에서의 기억들, 그 순간 순간을 아직은 떠올리기 힘들지만 글로 적으면서 좀 수월해지는 기분도 듭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적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도 주님의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직도 병원 마당의 성모님 앞에서 손을 모으고 간절함을 기도로 아뢸 때, 그 해 2월의 찬바람이 얼굴에 닿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 10월 호에는 가작 수상자 정인환(바오로, 두산성당) 씨의 작품이 실립니다.(가나다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