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에는 옛 솔로몬 성전의 크기에 따라 지어진 성당이 있다. 대략 길이 41 미터, 폭 13 미터에 이르는 단아한 공간, 여기는 교황성하께서 미사를 집전하시는 곳으로 교황 식스토 4세의 이름을 따서 시스틴 성당이라 불린다. 20여 미터 높이의 천장에는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벽화가 자리 잡고 있는데, 아담과 손끝을 맞댄 채 생명의 숨결을 전하는 창조주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행복하여라,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창조주의 모습을 마음으로 보고 그려낸 이여! 그 재능에 걸맞게 고뇌와 열정 가득한 삶을 살았기에 우리는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또한 이 자리에는 더 큰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으니 바로 공간을 가르는 소리와 음악에 관한 이야기도 놓칠 수 없지 않은가? 지금으로부터 오백여 년 전, 그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는 천상의 음악을 빚어내고자 했던, 당대 최고의 음악가 팔레스트리나의 고뇌와 열정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본명은 죠반니(요한) 피에르루이지. 일찍부터 로마 외곽에 자리 잡은 팔레스트리나 교구에서 음악활동을 펼치면서 명성을 쌓은 덕분에 이 도시의 명칭이 더해진 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때 알고 지내던 델 몬테 주교가 교황(율리오 3세)으로 선출되어 평소 눈여겨 보아둔 팔레스트리나를 교황청 음악가로 데려가기 원했고, 이때부터 시스틴 성당의 음악감독이자 교황성하의 작곡가로서 화려한 삶이 시작된다.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성직자가 아닌, 그것도 결혼까지 한 일개 평신도가 이런 중책을 맡았다는 것은 오늘날 입장에서 보더라도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여하튼 팔레스트리나는 미사 때마다 시스틴 성당의 가장자리에 자리잡은 성가대석에서 열두 명 남짓한 성가대원들과 함께 자신이 갓 지어낸 음악을 연주하면서 행복한 시기를 보냈다. 지상 교회의 영적 지도자 교황성하께서 든든한 후원자이신데 이보다 더 명예롭고 신나는 일이 또 있었을까? 그러나 행복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한다. 율리오 3세 서거 후, 그 뒤를 이은 마르첼로 2세 교황도 3주 남짓 가장 짧은 재위기간이라는 기록만을 남긴 채 선종하시면서, 오년 남짓 승승장구하던 젊은 음악가의 삶은 끝없는 내리막길로 치닫게 된다.
본래 바티칸의 감독직은 성직자들이 맡았던 바, 팔레스트리나와 같은 결혼한 평신도들은 일괄적으로 해임되기에 이르렀고, 향후 이십 년간 그다지 주목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더구나 사오십대 장년에 이르러서는 두 아들과 아내가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큰 비극을 체험하게 되니, 이 무렵 작곡한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합창곡에서 그 측은하고 비장한 마음을 엿보게 된다.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우리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하는구나.
“자, 시온의 노래를 한 가락 우리에게 불러 보아라.”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리리라. (시편 137,1-5)

예술가는 자신의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바꾸는 사람이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기원전 586년,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 맺힌 슬픔이 담긴 시편 137편이 팔레스트리나 최고의 걸작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렇게 부인과 사별한 지 8개월 후, 팔레스트리나는 돈 많은 과부와 재혼해서 비교적 안정된 노후를 보내게 된다. 그의 작품들이 출판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하니, 물 흘러가듯 지나가는 세상 섭리에 작은 미소만 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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