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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정 선생의 교실이야기 2
흔들리며 피는 꽃


이유정(데레사)|계산성당, 대구가톨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무학고등학교

 그렇게 무덥기만 하던 여름이 슬그머니 꼬리를 감췄습니다. 살갗을 스치는 바람의 선선한 촉감이 상쾌함을 전해줍니다. 이런 평온함이 가득할 것 같지만 사실 학교에서의 매일매일은 숨가쁘게 돌아갑니다. 학교가 뭐 그리 바쁘냐고 반문하고 싶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해야 할 일들을 알리는 많은 쪽지와 공문, 그리고 중간 중간 학생이나 학부모 상담 활동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바쁜 와중에 가끔은 학생들에게 언성을 높여야 할 일도 생깁니다. 수업 중에 전자기기를 만지다 걸린 학생, 전날 야간 자습에 빠진 학생, 교사를 무안케 만들 정도로 널브러져 자는 아이들, 두발검사에 걸린 아이들 등이 교무실에 불려오면 학생도, 교사도 모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며칠 전 두발검사에서 지적된 우리 반 아이 4명을 차에 태우고 학교 가까이에 있는 미용실을 찾았습니다. 점심시간 한 시간 안에 4명이나 깎아야 하니 마음이 무척 바빴습니다. 점심을 못 먹는 것이 안쓰러워 옆에 있는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까지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머리카락을 왜 짧게 잘라야 하느냐며 퉁명스럽게 대드는 녀석의 투정은 제 속을 들끓게 했습니다. 결국 미용실에서 제 언성은 높아지고야 말았습니다. 공교롭게도 5교시 수업이 바로 우리 반이었습니다.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다른 때보다 더 열심히 “잘 한다. 멋있다.”를 연발하며 수업은 했지만, 종례까지 그 언짢은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종례 후 문을 나서는 저를 뒤따르던 그 녀석은 무척 쑥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아깐 정말 죄송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라고 한 마디를 던지며 웃어 줬습니다. 그 순간 저는 오후 내내 체증처럼 가슴을 탁 막고 있던 큰 덩어리 하나가 순식간에 빠져 나감을 느꼈습니다. 20년 가까이 교직생활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저는 이 작은 행복에 가슴이 설렙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도종환 시 〈흔들리며 피는 꽃〉

 

아이들은 그렇게 자라는 것 같습니다. 덜 자란 , 여리디 여린 꽃이기에 작은 바람에도 더 잘 꺾이고, 적은 빗물에도 쉽게 젖어 쓰러지는 것처럼. 그래서 부모나, 선생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곁에서 바람도 막아주고, 빗물도 털어줘 자신을 끝까지 잘 지킬 수 있게 도와주라고 우리 하느님이 그래서 교사와 부모를 아이들에게 준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몇 년 전 5월 초에 학생의 어머니 한 분이 교무실을 찾아 오셨습니다. 차분한 모습의 어머님께서는 행여나 자신이 학교에 온 것을 아이가 알까봐 연신 교무실 문쪽으로 고개를 돌리셨습니다. 몇 마디 오가지도 않았는데 그 어머니께서 갑자기 말씀도 채 잇지 못하시고 울음을 토해 놓으셨습니다. 얼마나 슬프게 우시던지 제 눈시울도 따라 붉어졌습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막무가내로 학교가 다니기 싫다며, 자퇴해서 검정고시를 치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아들을 어찌할 수 없어 오셨다며, 지금 같으면 딱 죽고 싶다며 울음을 깨무는 그 어머니의 모습은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꼭 고등학교만은 졸업시키고 싶다는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을 들으며, 제가 끝까지 붙잡아 보겠으니 걱정 마시라는 위로의 말씀을 드린 후 댁으로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착잡한 마음으로 저는 늦은 밤 텅 빈 교무실에 앉아 학기 초에 그 학생이 쓴 자기소개서를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군데군데서 제 시야를 잡아 당겼습니다. 몇몇 곳을 형광펜으로 칠한 뒤, 다음날 그 학생과 면담을 했습니다. 그 아들은 뚱한 표정과 ‘너는 떠들어라. 난 안 듣는다.’란 속마음이 느껴지는 태도로 저를 외면했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라는 제 안타까운 외침에도 이 아인 “나중에까진 생각하기 싫어요.”라고 단호하게 제 말에 쐐기를 박았습니다. 그날은 그 학생에게 전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후 몇 차례의 상담으로 전 아무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그 아이의 큰 슬픔을 알아냈습니다, 자기가 정말 닮고 싶었던 아버지, 그래서 누구에게나 자랑하고 싶었던 큰 산인 아버지의 죽음은 그 학생에게 세상을 송두리째 빼앗긴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싫고, 학교도, 친구도, 선생님도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며 자신의 아픔을 토해 내는 아이 곁에서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흐느끼는 녀석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는 것뿐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 있어주면 안 되겠니?”라고 애걸하며 붙잡은 그 아들은 당당히 국립대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군대에 가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는 지금 아오스딩 성인이 되어 그의 어머니 모니카를 봅니다. 제가 재물과 향락에 빠져 타락의 늪을 허우적대고 있을 때, 우리 모니카 엄마는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울고 계십니다. 마니교에 빠져 갈수록 나날이 나락으로 치닫는 자식의 삶을 곁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어머니는 자신이 아들의 죄를 대신 보속하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하느님께 청하고 계십니다. 끝이 나지 않을 이 간절한 청원을 바라보며, 아마 아오스딩 성인은 끝까지 자신을 믿어주며 기도해 주는 어머니께 무척이나 미안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그 긴 방황을 멈추고 하느님 품으로 되돌아 와서 성인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들은 다들 그런가 봅니다. 아니, 부모는 다 그렇게 자식의 고통을 껴안고 더 고통스러워하는 존재인가 봅니다. 우리 반 학생도 자신의 어머니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가를 보며 그 미안함에 무릎을 꿇었으리라 짐작됩니다.

불현듯 모니카 어머니가 아들을 지켜보며 고통스러웠던 그 심장의 찢어짐도 눈 아래 사랑하는 아들의 주검을 껴안고 내려다 봐야만 했던 우리 성모님의 처절한 아픔에 비할 바는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오늘따라 성모당 동굴 안에 우두커니 서 계신 성모 어머니가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마무리한 후 저는 학교 경당에 들러 묵주 기도를 드리며 저 또한 성모 성심을 배울 수 있기를 청해보렵니다. 당신을 본받아 이 아이들을 끝까지 지켜봐 주고, 기다려 줄 수 있는 더 깊은 인내의 마음을 주십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