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 전에 읽은 글이 생각난다. 아나톨 프랑스의 단편을 읽었다. 바아나비라는 곡예사가 있었다. 요술과 광대놀음을 하며 거리에서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가난했고 햇빛이 없는 겨울이 되면 곡예를 할 수 없어 자주 슬픔에 빠졌다. 그러나 마음이 착한 그는 “이 세상이 이렇게 괴롭다면 다음 세상에서 태어날 때는 꼭 즐겁고 기쁜 세상이 올 것이야.”하며 하느님을 섬기고 성모님을 공경하였다.
어느 저녁, 궂은 비 때문에 곡예를 못한 바아나비는 요술 도구들을 담요에 말아 팔에 끼고 “오늘은 돈벌이를 못했기 때문에 저녁을 굶어야겠구나.”하며 힘없이 길을 걸어갔다. 그때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신부님을 만났다. “신부님, 저는 요술쟁이 곡예사입니다.”하고 인사를 드리며 “언제나 성모님에게 찬송과 기도를 바치며 사시는 신부님들이 부럽습니다.”라고 하였다. 남루한 곡예사를 측은하게 생각하신 신부님은 그를 성당으로 데리고 갔다.
곡예사가 따라간 성당에는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과 성모님을 섬기고 있었다. 신부님은 어려운 글로 성모님에 대한 책을 썼고 어떤 이는 성모님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칭송하였고 어떤 이는 대리석을 끊임없이 망치로 쪼아 성모님의 자태를 만들기도 했다. 시인은 성모님에 대한 시를 짓고 음악가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성모님에게 바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요술과 광대놀음밖에 할 줄 모르는 곡예사는 성모님을 위해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그는 성모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며 혼자 성당 뜰을 배회하며 흐느껴 울기도 하였다.
어느 아침이었다. 잠을 깬 곡예사가 급하게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후 밖으로 나온 그의 이마에는 땀이 배어 있었다. 이런 날이 계속 되었다. 그때부터 곡예사의 얼굴에는 슬픔대신 웃음으로 가득하였다. 수상하게 생각하신 신부님이 곡예사의 행동을 관찰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곡예사가 또 성당 안으로 사라졌다. 신부님이 성당 문을 살며시 열어 보았다. 바아나비가 성모님 앞에서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며 혼자 곡예를 하고 있었다. 신부님은 “성스러운 성모님 앞에서 곡예를 하다니….”하며 그를 끌어내려고 하였다. 그때 가만히 서있던 성모상이 몸을 움직이더니 사뿐사뿐 곡예사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셨다.
이 글을 읽은 후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가난하고 외로운 바아나비, 곡예를 하는 것밖에는 아무 능력이 없는 바아나비, 성모님에 대한 한없는 사랑만을 지니고 있는 바아나비, 문득 곡예사의 겸손함과 순박함, 온전한 사랑과 신뢰, 이런 것에 성모님의 시선이 머물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손자, 손녀들을 생각하며 이 글을 소개한다. 지금 그들은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이다. 내가 이 글을 읽었을 때의 연령들이다. 이 이야기를 지금 아이들에게 소개하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 영혼의 존재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는 나이들이기 때문이다.
시월은 로사리오의 달이다. 성모님을 섬기는 달이다. 아이들에게 성모님의 사랑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고 싶다. 성모님과 곡예사의 아름다운 사건을 바라보며 하느님과 성모님을 섬기는 일은 대단한 업적이나 큰 능력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느끼게 하고 싶다. 작은 것, 가난한 것, 진실한 것, 순수한 것 속에 하느님과 성모님의 쉴 자리가 더 많이 있음을 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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