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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해 및 월간 〈빛〉 30주년 기념 신앙수기공모전 가작 수상작 ③
주님! 저의 손을 꼭 붙잡아 주소서


정인환(바오로)|두산성당

사람에게 내일이라는 미지의 믿음이 없다면 삶의 의욕이 없을 것이고 어떠한 환경에서 살더라도 믿음없는 삶은 희망없는 삶과 같다. 사람은 혼자가 아닌 너와 내가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이라 한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 창조주 하느님께서 천진난만한 천성(天性)과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인성(人性)을 주셨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거친 세풍(世風)에 오염되고 약육강식의 동물적 본성으로 약자를 지배하려 하고 약자는 항상 위축된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아등바등 살아가게 된다.

나는 고족하고 가난한 농촌에서 내 땅 한 뼘 없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까운 친인척 중에도 끼니 걱정없이 사는 이 없었으니 헐벗고 굶주림이 천부(天賦)의 숙명인 양 구명도생하였다. 여덟 살 철부지 때, 주린 창자를 채우려고 부모님 손을 잡고 낯선 만주 땅으로 이주해서 피땀으로 땅을 쪼아 씨앗을 뿌리다가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인지 그 해에 어머님을 여의고 고아 아닌 고아가 되었다. 계모를 맞아 성장하면서 티 없이 맑게 성장할 어린것이 울고 싶어도 맘대로 울 수 없어 고독으로 살아오다 광복을 맞아 귀국했다.

열다섯 살 알거지인 나는 남의 집 꼴머슴으로 팔려갔다. 또래들이 학교에서 공부할 때 나는 어깨가 짓뭉개지도록 지게를 지고, 낫과 호미에 손발이 찍혀가며 땅을 파고 풀을 베며 지옥 같은 7년 세월을 가진 자의 위세와 멸시에 억눌려 살았다. 배움이 목말라도 이슬마저 말라버린 끝없는 사막의 길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외로운 길목에 나는 사람의 냄새가 그리웠고 사랑의 결핍은 오늘의 고질(痼疾)이 되었다. ‘전생에 무슨 죄가 그리 많아 이토록 혹독한 형벌을 주시나요?’하고 하느님을 원망하며 체념하고 좌절하며 눈물도 말라버린 자학과 위축된 질곡의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내가 기댈 언덕과 의지할 구세주를 찾아 헤맸다.

우리 집은 대대로 조상 신앙으로 살면서 종교를 이단시 할 정도로 싫어했다. 간혹 절에는 갔지만 구경삼아 간 것이지 믿어서 간 것은 아니다. 내가 결혼한 후에 아내가 처음 절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느리 셋을 봤는데 맏며느리는 불교신자였고, 둘째 며느리는 개신교 신자라서 개종(改宗)을 하든지 종교를 버리겠다는 확약을 받고 결혼을 승락했고, 셋째 며느리는 종교가 없는 줄 알았는데 시집오면서 성모상을 장롱 안에 감춰놓은 것을 뒤늦게 알고 한 집안에 종교가 다르면 불화가 있다며 꾸짖은 바 있으나, 이들이 분가해 따로 살면서 성당에 다니는 것을 알았지만 모른척 지나갔다.

직장에서 퇴직하고 하릴없이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노는데도 돈이 필요하고 친구도 돈이 있어야 친구가 있으니, 무슨 일이든지 일을 한다는 그 자체가 은총이었다. 그래서 여럿의 권유도 있어 종중(宗中) 일을 하게 되었다. 원래 그 일은 제 몸 수고하고 제 돈 써가며 욕먹고 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내 딴엔 의욕적으로 봉사해서 그 성과에 대한 가부의 평가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오불관언 무관심이다. 무시당하는 기분에 허무하기까지 했다. 더구나 내 위에 어른이 없고 연하(年下)의 사람들뿐이니 의지할 데 없는 위치의 고독이다.

사람이 늙으면 마음도 몸도 약해지고 물질로 채울 수 없는 텅 빈 공허(空虛)를 느낀다. 이 공동(空洞)을 메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과 믿음뿐이다. 늙고 가진 것 없고 가까운 친인척도 없는 내가 어디서 위로를 받고 안정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러던 중 4년 전에 장모님이 작고하시었다. 장모님은 환갑을 지나 성당에 나가셨지만 신앙심은 굳건하셨다. 장례식장에는 매일 수많은 교우들이 와서 조문과 기도를 해주었고 엄숙한 장례미사를 보고 나는 감동했다. 너무 성스럽고 경건해서 약간의 호기심도 생겼으나 그 순간뿐, 세월은 또 그대로 흘렀다.

한 번은 외조모님 장례식 때 내가 감탄하는 것을 본 막내아들이 아버지, 어머니도 성당에 나가자고 졸랐으나 나는 오히려 내 앞에서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말라고 꾸짖었고 아내는 그때도 초하루 보름뿐 아니라 사찰의 다양한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열렬한 신자였다. 그런데 성당이라고는 외조모님 장례미사에 한 번 가 본 큰아들이 2011년 말경 “지난밤 꿈에 신부님이 저를 포옹해주시는데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더라.”면서 제 어머니더러 “우리도 성당에 가보자.”고 이야기 하는 것을 나는 그저 담 너머로 듣고 흘려 버렸다. 그러다가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갑자기 아내가 분가해서 따로 살고 있는 큰아들을 불러 성당에 간다며 나서는 것이었다. 나는 연말이면 누구나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들뜨는 것이라 생각하고 말리지 않았다.

그 후 아내와 맏아들이 주일마다 드러내놓고 성당에 나가는 것을 알았지만 말리지 않았으니, 그때부터 나도 주님의 부름을 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난 원래 종교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아내가 50여 년을 그렇게 열심히 다니던 절(寺)에 가서 부처님께 하직인사를 드릴 때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집에 와서까지 눈물을 글썽이며 개종을 결심했다고 얘기하는 모습을 보며 걱정도 되고 또 한편으로 신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2012년 2월 중순에 맏며느리가 집에 와서 “아버님, 우리도 성당에 같이 가 봐요.” 하기에 ‘아! 이것이 우연이 아니구나. 큰아들의 꿈이 이미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고 불교에 그렇게 심취했던 아내와 며느리까지 이러하니 이는 필연코 하느님의 계시(啓示)다.’라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예비신자로 등록해서 이미자(레지나) 분원장 수녀님의 지도로 교리를 배웠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신앙생활은 2012년 8월 18일 오후 4시에 대구대교구 두산성당 최휘인(바오로) 주임신부님의 주례로 6개월간 교리를 공부한 예비신자 27명과 함께 엄숙하게 세례를 받았다. 내 본 이름 뒤에 ‘바오로’라는 또 하나의 이름이 붙여졌고 하느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맹세를 하고 성체를 모셨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세례를 받고도 몇 년이 걸려 견진성사를 받는다는데 나는 한 달 만인 9월 23일 2대리구장 박성대(요한) 주교대리 신부님의 주례로 견진성사를 받았다. 본당신자 163명 가운데 최고령자(32년생)라고 만당(滿堂)의 축복을 받으며 특별 선물까지 받았으니, 성령의 은총으로 신앙의 진리를 용감히 증거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열심히 봉사하는 신앙인으로 살겠다는 서약을 하였다.

그러나 무식하고 융통성 없이 완고한 내 성격 탓에 아직도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잘 믿지 못한 채 하느님의 복음을 듣고 기도를 드리고 요한성경학교에서 강의도 들으며 착실한 신앙인이 되겠다고 정진하고 있으나 아직도 캄캄하다. 나는 내게 묻는다. ‘이 지구상에 10억이 넘는 가톨릭 신자 중에 국가원수가 몇 명이며 과학자, 철학자, 지구촌을 이끌어가는 석학들이 즐비한데 늙고 무식한 네가 뭐 안다고 옹고집을 부리고 있냐?’ 라고 말이다.

나는 성직자는 보통 사람과 달리 근엄해서 함부로 범접 못하는 존귀한 분이라 여겼었다. 그러나 우리 성당 신부님이나 수녀님은 너무나 서민적이며 소탈하고 인정미 넘쳐 맏형 같고 누님 같아 신자들의 언 손을 두 손으로 덥석 잡아 녹여주시는 인자함에 나는 반했다. 또 배우 같은 미남의 총회장님도 너무나 다정해서 이분들이 나의 발길을 성당으로 당기고 있다고 믿는다.

콩나물은 물에 잠겨 있어 크는 게 아니다. 흐르는 물에 젖어 자란다. 나도 훌륭한 성직자와 교우들과 접촉하다보면 거룩한 성수가 몸과 마음을 적셔 주실 것이라 믿고 자신과의 싸움에 기어이 이겨서 마침내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신자가 되겠다고 다짐하며 남산동 성모당에 가서 예수님 성상의 손을 잡고 빌었다. “주님, 가야 할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 늙은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잡은 주님의 손을 뿌리치지 마시고, 끝까지 잡으셨다가 하느님의 곁으로 불러주소서. 아멘.”

* 11월 호에는 입선 수상자인 고유현(베로니카, 성건성당) 씨의 작품이 실립니다. (가나다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