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헨델이라는 작곡가의 이름 앞에는 묘한 호칭이 붙는다. 음악의 어머니!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초상화를 바라보면 그저 풍채 좋은 아저씨의 모습만 보일 뿐인데 어머니라 부르자니 조금 쑥스럽기도 하다. 왜 이런 일이 생겨난 것일까? 같은 해에 태어난 바흐라는 음악가를 크게 존경하는 마음에서 ‘음악의 아버지’라 먼저 부르고 보니 그에 못지않은 헨델에게는 ‘음악의 어머니’라는 별명이 따라 붙은 것이다. 그러므로 ‘헨델과 바흐는 혹시 부부가 아니었는지?’, 아니면 ‘그 둘 사이에 태어난 자식은 누구일까?’ 따위의 야릇한 상상은 더 이상 하지 말기 바란다.
음악의 어머니와 아버지라 불리는 이 두 작곡가를 비교해 보면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들을 찾아볼 수 있다. 둘다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드러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삶은 너무나도 다른 방향으로 풀려나갔다. 바흐는 열 살에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형님과 삼촌네 집에서 눈칫밥 먹으며 살다가 기숙학교에서 배고픈 시절을 겪어야 했다. 두 발로 사방팔방 걸어서 선생을 찾아다니고, 악보를 베끼며 음악을 배웠을 뿐 독일 밖으로 나간적도 없었다. 반대로 헨델은 부유한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일찍부터 함부르크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며 당대 최신 오페라 스타일을 배웠고, 나중에 영국에서 국제적인 음악가로 성장하였다.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던 바흐는 두 번의 결혼을 거쳐서 모두 스무 명의 자녀를 보았다. 그 중에 절반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음을 감안하더라도 대가족을 거느린 살림살이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헨델은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사업 수완도 뛰어나서 손수 오페라 극장을 운영하며 연주할 오페라를 작곡하고 지휘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발표하는 곡마다 갈채를 받고, 손대는 일마다 성공하니 가히 마이다스의 손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나이 쉰을 넘기면서 헨델의 삶에 위기가 찾아왔다. 몇몇 작품들이 연이어 흥행에 실패하고 빚에 쪼들리는 가운데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 고, 오른쪽 반신 마비가 와서 펜대 하나 놀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쟁자들은 비웃고 이제까지 도움을 주던 후원자도 사라져 버렸다. 친구들도 등을 돌리고 온갖 명예도 사라지는 듯했다. ‘아,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않은가!’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하루 아홉 시간씩 온천물에 몸을 담그면서 강한 재활의지를 불태우자 기적처럼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조금씩 팔이 움직여지고 절뚝이며 걸을 수 있게 되었지만 헨델의 마음 한구석에는 불만스러움이 가득 자리잡고 있었다. “몸도 그렇고 음악도, 인기도 예전 같지 않아!” 투덜거리며 하루하루 지내던 헨델에게 어느 날 소포 꾸러미가 배달된다. 겉봉을 뜯는 순간 모습을 드러낸 것은 찰스 젠넨스라는 사람이 성경의 각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탄생, 수난과 부활에 관한 구절을 골라낸 가사 대본이었다. 늘 그러려니 생각하며 스쳐지나갔던 말씀들, 나를 지어내시고 나에게 재능을 주신 분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음악이 들리기 시작했다. 뭔가에 홀린 듯, 이십여 일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방구석에 처박혀서 바로 그 유명한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완성해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하느님을 보리라.” - 오라토리오 〈메시아〉 제3부 소프라노 아리아의 가사(욥 19,25-26 참조)
아무리 제 잘난 맛에 사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우리의 근본을 버리고는 살아갈 수 없지 않겠는가?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사랑하시는, 보이지 않는 그분을 향할 때 더 멋진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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