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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해 및 월간 〈빛〉 30주년 기념 신앙수기공모전 입선 수상작 ①
그 사랑 온 누리에 닿아있음을…


고유현(베로니카)|성건성당

 

밤하늘을 가득 채운 영롱한 별들과 그 별빛을 머금은 대서양이 풍요롭게 넘실거리는 이곳, 저는 지금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에 있습니다. 한국 국제자원봉사단의 일원으로 치과위생교육을 위해 이곳에 파견된 지 6개월째, 제가 있는 마을은 아름다운 자연과 소박하고 정겨운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평화로운 곳입니다.

전체 면적은 우리나라의 7.5배 정도이며 국교가 이슬람이므로 국민의 99%가 무슬림이고 가톨릭교회는 전 국토를 통틀어 몇 안 되는, 그야말로 가톨릭 신앙의 오지라 표현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듯한 곳이지요. 부모님의 걱정과 만류가 만만치 않았지만, 어렴풋이 꿈꾸어 왔던 제 소망의 한 부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제 삶의 중심에 자리하고 계신 주님께서 눈동자처럼 늘 저를 지켜 주시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씩씩하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듯한 이곳으로 저는 훌쩍 떠나 왔습니다.

한편에선 인터넷을 검색하며 스마트폰으로 통화를 하고 또 다른 한편에선 우물을 긷고 장작불을 지펴 빵을 굽습니다. 제가 상주하는 이곳도 낙후된 지역이라 문명의 편리한 혜택을 누리며 사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다수의 사람들도 삶이 불행하거나 남루해 보이진 않습니다. 대체로 3~4대가 한 가족을 이루며 좁은 공간에서도 온 식구가 모여 식사를 하고 정담을 나누는 모습이 참 화목하고 보기 좋습니다. 마당 안을 수시로 드나드는 떠돌이 개나 고양이에게도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빈 공간 한 켠은 언제나 쉬고 잠잘 수 있도록 내어주는 순박한 사람들. 그러나 그것을 베풂이나 나눔이라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저 배려하고 공존하는 예사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런 모습은 거리 곳곳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넘어져 우는 어린 아기를 능숙한 솜씨로 일으켜 머리꼭지에 뽀뽀를 해주고 옷을 툭툭 털어 아기 엄마에게 데려다주는 여섯 살배기 꼬맹이와 행길을 가로지르는 양떼들을 느긋이 기다려주는 운전기사님, 넓은 들판을 마음대로 뛰어다니며 풀을 뜯는 소떼와 그 옆에서 새끼 병아리들을 챙기기에 바쁜 어미닭들, 채 열 살도 안 된 어린 양치기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순한 양들과 무거운 짐에 잔뜩 심통이 난 당나귀의 우스꽝스런 표정조차 여유롭고 평화로워 보입니다. 조심조심 걸어 다녀도 신발바닥에 소똥이며 당나귀똥을 잔뜩 묻혀오는 저를 보고 깔깔 웃으며 놀려대던 주인댁 둘째딸 사미아는 어느새 제 신발을 씻어 살짝 가져다 놓기도 합니다.

 풍족하진 않지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기에 이곳의 행복지수는 세계 어느 문명국과 비교해도 분명 우위일 것입니다. 다만 청소용 수세미와 칫솔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며 충치가 생긴 치아는 뽑으면 간단한데 왜 굳이 치료를 해야 하는지 치아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기에 무척 안타깝습니다. 발치를 할 수밖에 없을 만큼 충치가 심한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이 없는 잇몸을 드러내며 아기처럼 환히 웃으시는 할머니에겐 예쁘고 가지런한 틀니를 해 드렸으면 좋겠다 싶기도 합니다. 구강보건에 대한 관심도가 낮은 주민들에게 지금 당장 효율적인 교육방법을 강구하기보다는 먼저 친교의 단계가 필요할 것 같아 많이 얘기 하기 위해 애쓰며 그들의 문화에 익숙해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저를 이곳으로 불러주신 아버지 하느님께 맡겨드리려 합니다.

이곳으로 오기 전, 2년간은 주일미사 참례가 어려우리라 예상했었기에 본당신부님께 말씀을 드리고 떠나 왔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나라 최북단에 위치한 이 마을에, 그것도 제가 살 집의 행길 건너편에 아담하고 예쁜 성당이 한 폭의 그림처럼 서 있었습니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의 놀라움과 기쁨, 그리고 감사함을 생각하면 지금도 콧등이 시큰해 옵니다. 마치 오래 전부터 저를 위해 서 있었던 것처럼, 제가 올 것을 예상하여 주님께서 미리 마련해 두신 것처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파장 깊은 감동이었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평화 가득한 주님의 집은 소수의 가톨릭 신자들에겐 신앙을 고백하는 믿음의 성소이며, 이곳 주민들에겐 생활에 필요한 모든 기능과 언어를 배우는 곳으로,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소중한 곳입니다.  

 지난 성탄절 미사봉헌 후에 신부님, 수녀님들과 함께 오붓하고 조촐한 다과 파티도 열었습니다. 거리에 울려 퍼지는 캐럴도 없었고 ‘성탄 축하합니다!’를 크게 외치는 사람도 없었지만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그 어느 때보다 큰 기쁨으로 제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며 제가 만나는 모든 이들을 아기 예수님으로 볼 줄 아는 착한 눈을 허락해 주시길 간청하며 잊지 못할 성탄의 밤을 보냈습니다.

전례력을 따라 해마다 성탄을 맞듯 이제 또 사순시기를 맞이했습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에 비길 순 없지만 올해는 꼭 제가 행할 수 있는 작은 사랑을 실천해 보리라 다짐해봅니다. 성탄도, 사순시기도 낯선 곳에서 맞게 되었지만 제가 서 있던 어느 곳보다 더 가까이에서 주님을 뵙고 그분과 함께 숨 쉬며 그 분의 따스한 눈길아래 보호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저는 주님의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지고 부지런히 제 길을 갈 것입니다. 2년간의 체류기간이 끝나 모국으로 돌아갈 때엔 어떤 아쉬움도 후회도 없이 열심히 살았던 제 2년의 삶을 주님께 예물처럼 내어드릴 수 있게 말입니다.

선하신 주님! 제 모든 지체와 온 정신에 당신의 사랑과 겸손을 불어넣어 주시어 해야 할 일을 다 할 수 있는 착하고 성실한 종이 되게 하소서! 또한 미래를 향한 희망과 믿음을 주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살아남는 것이 아닌 진정한 삶을 살아내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 12월 호에는 입선 수상자인 윤금철(베드로 다미아노) 씨의 작품이 실립니다. (가나다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