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갈수록 이탈리아 말도 능숙하게 되고 외국생활도 어지간히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식생활에 별 어려움이 없어지게 되니 사람 살 것 같다. 어디를 가나 그놈의 치즈 냄새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더니, 물론 지금은 빵을 먹을 때 치즈를 곁들여 즐겨먹지만 익숙해지기까지는 곤욕이었다. 집에서 누나들이 별미로 한번씩 만들어주던 서양음식도 별로 달갑게 먹지 않았었다. 그래서 유학 간다고 했을 때 수녀누님이 “너, 서양음식 싫어하는데, 어떻게 할래?”하면서 걱정하던 기억이 난다.
학기 중 기숙사에서나 어디서나 일상생활 용어는 이탈리아어를 사용했고, 학교에서의 강의는 라틴어로 했다. 또한 매주 목요일마다 의무적으로 외출을 해야 했다. 이유는 될 수 있는 대로 역사적으로 뜻있는 유적지나 성지를 돌아보라는 뜻에서였다. 바티칸 시국은 물론 교황 궁전, 바티칸 박물관을 위시하여 로마 시내에 산재해 있는 모든 역사적인 유적들, 초세기 때부터 쓰던 교회 건물, 아주 오래 된 성당, 수도원, 베드로·바오로·성모·사도 요한 4개의 대성전, 그 외에도 네로 황제 전부터 있었던 유적들, 예를 들면 콜로세움, 포룸 로마눔, 삔치오, 뜨리니따 디 몬떼 성당, 삐아짜 디 스빠니아, 쟈니꼴로 언덕, 비아 아삐아, 까다꼼배, 뜨레폰따내 등 로마를 중심해서 근교, 점심식사 후부터 저녁 식사 전까지 돌아 올 수 있는 곳이면 어디를 가도 좋았다.
공부한다고 학교 기숙사 안에만 처박혀 있으면 항상 다니는 곳만 다니고 많은 것을 보지 못한다고 때로는 학교에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조직적으로 로마를 공부하도록 했다. 그 덕택에 로마에 대해 많은 것을 보고 배웠지만, 또한 그것 때문에 한국 순례자들이 왔을 때 안내하느라고 시간도 많이 허비했다. 우리가 로마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이탈리아에 한국 대사관이 없었다. 우리가 도착하고 몇 년 후에 처음으로 한국 대사관이 생겼고, 그때 대사관 사무실을 구하는 일부터 우리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전까지는 프랑스 파리에 있는 한국 대사관이 로마에 있는 우리들까지 돌봐주었다. 로마에 사는 한국 사람이래야 우리밖에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 정부손님이 오면 파리 영사관에서 수행하지 못하고 주로 우리에게 연락하고 안내를 부탁하곤 했다. 또 여권기간 연장도 반년밖에 주지 않던 것을 우리에게만 파리 영사관의 심부름을 한다고 2년씩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이승만 정권은 외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규제를 많이 했다. 유학생이건 장사하는 사람이건 여권 체류 연장 건으로 사람을 묶어두려고 한 것 같다. 로마에 대사관이 생겼을 때부터 우리가 관여했기 때문에 대사관과 우리 사이는 항상 좋았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승만 정권 때의 로마의 대사는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할 당시 알았던 김영기라는 분이었다. 장면 정권 때에 있던 참사는 장면 박사와 친분이 있는 안응열 씨였다. 그는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서 일하던 분으로 불어를 아주 잘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달래의 한국 순교사 를 번역한 분이다. 박정희 정권 때의 대사는 이종찬 장군이었다. 그는 3성 장군으로 부산 정치파동 때 계엄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을 거역했다고 해임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쥔 사람의 힘의 횡포는 쓸데없는 자기 과시인 경우가 허다하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렇게 보인다. 부산 정치 파동 때만 해도 야당이 국회에서 부당하게 대통령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고 야당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가기 위해 탑승한 버스를 헌병이 끌고 시에서 멀리 떨어진 군부대에 감금하라는 대통령의 명령을 계엄사령관이 어겼다는 것이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이라는 권력은 정의와 불의를 가리지 않고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인지…. 그는 군에서도 명망 있는 장군으로 칭송받고,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이 엄격한 분이었다. 종교를 갖지 않았지만 대단히 종교적인 분이었고 남의 어려움을 헤아려 주고 부하를 사랑하는 대단히 훌륭한 분이었다.
로마에서 유학하던 10여 년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낱낱이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지금 생각하면, 국내에서만 살았더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들, 만나지도 않았을 사람들, 알지도 못했을 사건들에 봉착하기도 했다. 비오 12세의 서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신 요한 23세의 등극, 바오로 6세의 계승, 교황 되시기 전부터 잘 알던 북 이탈리아의 ‘빅또리오 베네또’교구장이었던 요한 바오로 1세 그리고 지금의 요한 바오로 2세를 모두 직접 알현 할 수 있었던 영광을 가졌었다. 그뿐 아니라 로마를 방문한 많은 순례객들, 정부 요인들, 세기에 한번 열릴까 말까 하는 공의회, 신학교생활, 서품 후 계속 수학한 라떼란 법과대학, 베드로 꼴레지오 신부 기숙사 생활, 방학 동안 방문한 유럽의 여러 나라, 재미있었던 일들, 난처했던 일들, 즐거웠던 일 등을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로마로 유학 갈 때는 스무 살 어린 나이였으나 귀국할 때는 30대 중반이었다. 그간 로마에 살면서, 공부하면서 나는 행복했다. 그러나 대학시절과 청년 시기에 있을 수 있고 또 배울 수도 있었던 한국적인 것에 대해서는 모자라는 것이 많다. 그 점이 조금 아쉽다. 로마 울바노 대신학원에서는 매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부제 서품식이 있었다. 항상 여름 방학 때라, 그림같이 아름다운 별장 정원 나무 그늘 밑을 거닐면서 묵상하기가 좋았다. 1957년 만8일 피정을 마치고 우리 51명의 부제 후보자들은 각기 제 나라 식으로 무늬를 수놓은 장백의를 팔에 걸치고 입당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수녀 누님이 보내 주신 장백의를 사용했다. 기다리는 동안 모두의 표정들이 한결같다. 입가에는 흐뭇한 엷은 웃음을 머금고 응시하는 눈의 초점은 제각기 ‘나와 하느님’만이 아는 곳일 것이다. 내가 신부되기를 그렇게 원하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엄마, 나 이제 부제가 돼. 장하지? 계속 기도해 줘.’하고 어리광을 부렸다. 엄마는 미소 지으며 ‘그래그래, 장하다.’하고 나를 어루만져 주시는 것 같았다. 행복했다. 예절 주례자는 인류 복음화 성성장이신 ‘삐에뜨로 푸마조니’추기경이었다. 전례가 진행되는 동안 엄숙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제대 앞에 부복해서 성인 호칭기도를 바칠 때는 가히 천국에 올라 온 기분이었었다. 전례가 끝나고 8월의 따가운 태양이 내리쪼이는 테라스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하고 기뻐했다.
방학이 끝나려면 아직 한 달 반이나 남았기에 별장에서의 자유로운 생활은 몸과 마음을 같이 살찌게 했다. 새벽미사가 끝나면 알바노 호수에 내려가서 낚시도 하고, 낚시를 하다가 그 자리에서 아침밥도 해 먹었다. 가끔 우리는 여럿이서 낚시하러 가곤 했는데, 사실 나는 낚시 하는 것에는 별 흥미가 없고 찌개 끓여서 밥 해먹는 재미로 낚시 가자하면 항상 따라나섰다.
매주 목요일에는 소풍을 갔다. 한번은 전교생이 버스를 타고 학교에서 정한 유적지나 바다에 가고, 또 한번은 우리가 목적지를 정해서 걸어간다. 우리가 정한 곳에 갈 때는 우리 스스로가 밥을 해 먹어야 하기 때문에 소풍 전날 별장 근처 식료품 시장은 북새통을 이룬다. 50여 개국 학생들이 흩어져 저마다 제 입에 맞는 반찬거리를 사느라 노천시장, 식료품상 할 것 없이 돌아다니는 꼴을 상상해 보면 가히 짐작이 갈 것이다. 물건 파는 주인들도 정신을 못 차린다. 같은 가게에 들어가서 고추를 사도 황인종인 한국 사람은 매운 것으로 달라 하고, 흑인들은 덜 매운 것으로 달라 하고, 백인들은 안 매운 것으로 달라 한다. 쌀도 매한가지다. 그 많은 종류 중에 우리 동양 사람들이 좋아하는 쌀은 비교적 값이 싸다. 한참 쌀을 고르다가 싼 것을 달라고 하면 가게 주인은 속도 모르고 ‘치내제들은 돈이 없는 모양이다.’라고 수군거린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동양 사람만 보면 그 사람이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상관없이 ‘치내제’혹은 ‘치나’라고 한다. 그 뜻은 ‘중국사람’혹은 ‘중국’이라는 뜻이다. 가게 주인이 무슨 소리를 하든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다만 우리끼리 좋으면 좋은 거지.
소풍갈 때는 모두 같은 장소에 가기 때문에 산이면 산, 계곡이면 계곡을 우리 학생들이 가득 메운다. 밥을 해 놓고 서로 초대도 하고 다니면서 남의 것을 맛도 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하루를, 아니 매 방학을 이렇게 즐겁게 보낸다. 즐거운 시간은 빨리 간다던가! 벌써 9월 하순이다. 10월 초는 개학이니 로마 기숙사로 돌아가야 한다. 금년 겨울에는 내가 신품성사를 받기 때문에 로마로 돌아가자 마자 서품 준비를 해야 한다. 마음은 벌써부터 바쁘다.
방학이 끝나고 별장을 떠나기 전에 교황 성하께 ‘저희는 내일 로마로 갑니다.’하고 인사하러 갔다. 다른 해 같으면 그냥 떠났겠지만 금년에는 성하께서 자주 편찮으셨고 또 우리가 떠나기로 한 때도 건강이 좋지 않다고 들었기 때문에 한번이라도 더 뵙고 싶었다. 사실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금년 성탄 때는 신부가 되고 신부가 된 다음엔 신학교 별장에 올 일이 없을 테고, 카스텔간돌포에 오지 않으면 자연히 교황성하 별장에도 갈 기회가 없겠지, 라고 생각하다가 ‘알현하러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알현장에 들어서자 ‘잘 왔다.’고 생각했다. 보통 때와 달리 스피커에서 특별 당부의 말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지금 교황성하께서는 건강이 좋지 않으십니다. 말씀도 하실 수 없기 때문에 멀리서 찾아오신 여러분께 인사만이라도 드리고자 하십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하고 조용히 성가가 흘러 나왔다. 잠시 후, 성하께서 두 팔을 벌리시고 인자하신 모습으로 발코니에 서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환호하는 우리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시고 계셨다. 평소 같으면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멀리서 나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하시고 여러 가지 말씀을 해주시는데, 오늘은 아무 말씀도 없으시고 구석구석 사람들을 내려다보시면서 고개만 조금 끄덕이신다. 성하께서 관중들을 향해 머리를 돌리시면 그쪽 관중들이, 이쪽으로 돌리시면 이쪽에서 환호소리가 요란하다. 갑자기 스피커에서 “지금 성하께서 여기 오신 여러분과 여러분들의 가족을 축복하십니다.”라고 하자, 편찮으신 성하께서는 왼손으로 강복하신다. 교황께서 힘드신 모습으로, 또 왼손으로 강복하시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힘겹게 강복을 주신 후, 돌아서는 교황님의 뒷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교황 만세!”, “건강하세요!”를 목청껏 소리 질렀다.
그 이튿날 신문에는 교황께서 많이 편찮으신 데도 많은 방문객을 접견하셨기 때문에 오늘은 접견을 못하시도록 의사가 국무성에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이 기회에 교황 비오 12세 성하의 일상생활을 독자들에게 잠깐 소개하려 한다.
교황께서 박식하시다는 것은 주지의 일이지만, 한 가지 놀랄 것은 유럽의 각 국어를 자국어와 다름없이 하신다는 것이다. 교황으로 등극되시기 전에 추기경으로서 파리에 파견되었을 때 노틀담대성당에서 하신 연설은 ‘보에시오(Boetio)’에 비교되었으며 비평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보기 드문 능변을 찬양하였었다. 교황께서는 능변은 물론, 고덕을 갖추신 분이어서 그 당시 사람들은 ‘훌륭한 인류의 지도자’라고 칭송했다. 교황이 로마의 중심인물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교황을 잘 모르는 이들이 법왕이라든가, 교황이라면 다락 위에 올려져 있는 인물로 생각하기 쉬우나 기실 교황처럼 바쁜 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루의 일과는 6시 반 기상으로부터 시작되어 손수 3층 침실 창을 여시는 것을 우리 학교에서 종종 본다. 성하 측근자의 말을 들어보면 성하께서는 여름, 겨울을 막론하고 아침마다 냉수마찰을 하신단다. 7시 10분이 지나 개인 성당에 드시어 20분간 기도하신 후, 미사를 바치시고 8시 반까지 그냥 성당에서 기도하신다. 조반은 8시 반 이탈리아 사람들 대부분이 하듯이 진한 커피와 우유, 토스트로 간단히 하신다. 8시 50분까지 식당에서 신문을 보시고 9시 바로 전에 서재에 들어가시며, 여기서 9시 정각부터 알현이 시작된다.
알현에는 네 종류가 있다. 일년 중 매일 교회 전체의 관리를 위하여 추기경(cardinal)들의 ‘정기알현’은 9시부터 11시 15분까지 하시고, 11시 16분부터 12시 15분까지는 외교관이나 기타 ‘개인알현(udienza privata)’이 허락된다.(지방 주교 알현도 여기에 속함.) 그것이 끝나면 성하께서 몸소 나오시어 응접실에 기다리는 여러 사람들에게 가신다. 우리들이 한 ‘특별알현(udienza speciale)’도 여기에 속한다. 12시 16분부터 30분 간 이야기하시고 축복하신다. 12시 45분부터 1시 30분이나 2시까지는 작은 중학교 운동장만한 방에서 ‘집단알현(udienza generale)’이 있다. 많을 때는 대개 2,3만 명, 적을 때는 3~4천 명까지 된다.(우리 학교 학생은 이때 입장의 제한을 받지 않으므로 가끔 알현하였다.)
점심은 항상 혼자서 드신다. 교황이 되신 이후로 한번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하신 일이 없다. 호기심 많은 분을 위하여 적어본다면, 성하께서는 닭고기 스프보다 쌀 스프를 더 좋아하시며 스파게티와 조류의 흰 살코기를, 야채는 시금치를 좋아하시며 백포도주를 작은 컵으로 드시나 겨울에는 붉은 포도주를 한 잔 드신다. 끝으로 진한 커피를 드시고 식사 후에는 반드시 한 시간 쉬신 다음, 4시에는 승강기로 산 다마조광장까지 내려가시어 기다리는 자동차를 타시고 정원에 가셔서 산책하신다. 우천 시에는 지붕이 있는 통로에서 산책하시고, 5시에 서재에 드시어 산보화를 벗으시면 성당에서 성무일도를 하시고, 6시에 서재에서 정기알현 때의 자료를 재검토하시는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신다.
저녁 8시 저녁식사를 드시고 성당에서 20분 정도 기도하신 다음, 9시에 또 서재에 들어가시면서 “지금부터 참말 내 시간이다.”하시며 이때는 연필로 쓰신 노트를 정리하시고 연설 원고 준비도 하신다. 대개 몸소 타이프라이터를 치시어 초안을 잡으시고, 만년필을 즐기지 않으시므로 보통 가는 펜을 사용하신다. 이 시간은 새벽 1시 30분 혹은 2시까지 계속된다. 2시에 또 성당에 가시어 성무일도를 하신 뒤에야 침실로 향하시는데, 침대는 귀천하신 전 비오 11세의 그 침상을 그대로 사용하고 계신다. 이것이 비오 12세의 하루 시간표다. 모르기는 하지만 왕이든, 대통령이든 혹은 수상이라는 사람 중 이런 생활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싶지 않다.
편찮으신 교황성하를 알현한 다음날, 별장을 떠났다. 4천 년 전 사화산이 된 카스텔간돌포 산의 분화구인 직경 2~3Km나 되는 알바노 호수는 그 둘레에 수많은 별장들이 있다. 그중 가장 크고 웅장한 것이 교황별장이다. 바로 그 옆에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학교 별장이 있다. 방학이 끝나고 로마로 향하면서 ‘이제 신부가 되면 신학교 별장에 올 기회는 없겠지!’하는 생각에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몇 년 동안 방학 때마다 이 별장에 와서 너무나 재미있게 지냈기 때문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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