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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마음으로 세상보기
눈높이 사랑


김철재(바오로)|제5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언젠가 미국에서 교포 사목을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잘 산다는 나라 미국 사람들은 누구나 똑똑한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얘기하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어정쩡한 모습을 보여주기만 했습니다. 독일에 갔을 때도, 중국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나라에서 똑똑하다는 사람들 모두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사용했던 언어가 그 나라 말이 아닌 내 나라 말인 한국어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에 가서 그 나라 언어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유독 우리나라 말만 고집한 내가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어리석음은 하느님과 우리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의도를 들으려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언어만 고집스럽게 사용하는 어리석음 말입니다. 하느님은 겸손과 비움의 언어를 사용하시고 우리는 자만과 채움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말을 하느님께서 알아들으시라고 언성을 높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구원의 말씀, 구세주의 구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강생하심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눈높이 교육’이며 ‘눈높이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저 멀리, 저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시고자 당신을 스스로 낮추어 사람이 되시고,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셨습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누구나 사랑을 하고 싶지만 아무나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교만하거나 자만에 빠져 있는 사람은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겸손만이 진정한 사랑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사람들을 동물의 품위에서 천사보다 높은 품위, 바로 당신 자녀로서의 품위로 올려 주시고자 하십니다. 다른 종교의 신들은 인간 스스로 높은 곳으로 올라오기를 기다리거나, 신이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들어 올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의 잘못 때문에 깨어진 관계를 개선하시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먼저 화해의 손길을 건네시고, 높은 곳에서 스스로 당신을 낮추어 내려오시어 가장 가난하고 낮은 자가 되어 오십니다. 겸손하신 하느님께서는 사람들보다 낮은 곳에 내려가시어 사람들을 떠받쳐 올려 주시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의미이며 하느님의 ‘눈높이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만나러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고’, 우리 사람들은 언제나 더 높이 ‘올라가고’자 합니다. 구세주께서는 낮고 낮은 곳에 임하시어 가장 낮은 곳에 거처하는 사람들부터 만나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높은 곳에 올라가서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더 많이 누리고자 합니다. 내려오시는 구세주와 올라가고자 하는 우리의 만남은 엇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루카 3,4-5) 세례자 요한의 이 말씀은 우리가 구세주를 맞이할 준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더 많은 것을 내게 끌어 모으려는 욕심이나 아집의 ‘골짜기’는 메우고, 더 많은 인정과 박수를 받고자 하는 교만과 자족의 ‘언덕’은 낮추고, 이웃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조건적 만남의 ‘거친 길’을 없애버리고 내가 먼저 용서하고 화해하는 손길을 건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를 참으로 만나 뵙고자 한다면 그분이 먼저 내려가 계신 그곳으로 우리도 낮추어 내려갑시다. 비천한 우리 사람들의 벗이 되어 오시는 그분을 닮아 우리도 우리 가운데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어 줍시다. 이 성탄에 더 많은 것을 선물로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이 비록 적지만 더 적게 가진 이들에게 선물을 나눕시다. 구세주를 만나러 낮은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