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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떠나기 연습


강찬중(바오로)|대명성당, 수필가

아파트의 9층 베란다에서 앞산을 넘겨보다가 갑자기 ‘떠나기’라는 낱말이 떠올랐다. 얼마 전 70대 중반인 대자의 부음을 들었다. 암 진단을 받은 뒤 어려운 수술도 잘 해냈고, 수년간 항암치료도 잘 견뎠고, 6개월마다 검진을 받으러 서울까지 드나들었다. 그래도 전문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기에 좋은 결과를 기대했었는데…. 먼 길 떠나기 전에 차라도 한 잔 나누었으면 참 좋았을 걸….

대구대교구청 내에 자리한 성직자묘지의 문주에 새겨진 금언,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내 차례지만 내일은 네 차례다.)”가 떠오른다. 아마도 늘 깨어 죽음을 준비하라는 말일 게다. 입관 예절에서 보면 시신을 씻기고 옷을 입히고 겹겹이 싸고 동여매고 하는데, 옷값의 고하야 있을망정 그야 말로 빈손으로 가지 않던가? 예전에는 쌀 몇 톨, 동전 몇 닢을 여비로 입에 넣어주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것도 생략되어 여비 없이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으니 좋은 세상이다.

대충 삶을 마무리하면 물려줄 재산이 없으니 싸움할 걱정없고, 학벌이란 것도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늦게 야간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으니 뭐 그리 내세울 것도 없다. 또 벼슬이란 것도 교직생활 45년에 전문직 25년을 거치는 바람에 학무국장이란 것 몇 년 한 것뿐이고, 훈장도 연한이 차서 받은 공로상 정도이니 누구나 받는 것이고, 취미로 글을 써서 몇 권의 수필집은 냈으나 명 수필 한 편도 남긴 것 없으니 부담이 적다. 이제 나이가 들어 한두 가지 병은 친구처럼 데리고 다니고 있으나 그 또한 견딜만하다. 그래도 내 손으로 밥을 먹고, 잘 걷고, 정신도 멀쩡하니 기쁘게 갈 일만 남은 것 같다.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님의 묘비명에 대한 글을 읽었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 ‘어영부영하더니 내 이럴 줄 알았다.’는 잘못 번역한 것이고 원문을 보면 ‘오래 살더니 내 이런 꼴 당할 줄 알았다.’ 또는 ‘오래 살면 결국 죽는다.’라는 당연한 명제를 특유의 풍자적 표현으로 말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사실 그는 극작가, 소설가, 수필가, 음악평론가로 살며 노벨문학상과 아카데미 영화상을 받았으니 잘못 산 것도 아니지 않는가?

사람이 죽을 때 두 손을 편다고 하는데 그건 ‘세상 모든 게 내 것이 아니더라.’는 뜻을 함축한 것이리라. 우리들 뇌리에 새겨진 성스러운 죽음을 본다. 요한 23세 교황님은 베네치아 교구장 시절 “나는 가난하지만 존경스럽고 겸손한 사람들의 자식으로 태어나 죽을 때도 가난하게 죽을 수 있어서 너무나도 기쁘다.”라는 영적유언을 남기셨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나는 행복합니다. 당신도 행복하세요.”라는 말씀을 하셨다. 생의 결산에서 돈이나 명예, 지위보다 가난하고 행복한 삶이 우선 가치이니 천만다행이 아니랴.

이제 서산에 기운 해를 보며 두 손을 편다. 한 번 주신 삶인데 멋지게 떠나자. 그 어느 날 가족들의 임종기도를 들으면서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이 한 마디를 남기고 웃으며 눈을 감는다면 좋으리라. 거두어 가실 날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기쁘게 감사의 하루하루를 살아가자.

 

 * 약력 : 「문예사조」 및 「수필문학」 천료. 한국문인협회, 영남수필문학회, 대구수필가협회, 대구가톨릭문인회 회원. 수필집으로 〈내가 선 자리에서〉, 〈하얀 바다의 명상〉, 〈느끼며 살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