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국제결혼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대구에 시집을 왔던 17년 전 만해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통계에 의하면 현재 결혼을 하는 부부 10쌍 중에 1쌍이 국제결혼이라고 한다. 시골의 경우에는 무려 3쌍 중 1쌍이 국제결혼이라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대부분의 어린 여자 아이들이 그렇듯이 나도 어렸을 때 결혼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꿈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누구랑 결혼을 해서 어디에서 살게 될까? 그리고 나의 성은 어떤 성으로 바뀔 것인가? 그 당시 좋아했던 연예인이나 좋아하는 친구들의 성과 자신의 이름을 합쳐보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혼인신고와 동시에 부부 중의 한쪽 성을 택해야 한다. 거의 대부분의 부부가 남자 쪽의 성을 선택하지만 집안에 아들이 없을 경우 여자 쪽의 성을 선택해서 대를 이어가기 위해 데릴사위를 세우기도 한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 어렸을 때 꿈꾸던 결혼생활과는 전혀 다른 인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은행에 다니시던 아버지와 전업주부이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 부모님, 언니, 그리고 남동생, 이렇게 여섯 식구였고 아주 평범한 가정이었다. 평범한 가정이기는 했지만 할머니께서는 평범하지 않으셨다. 할머니께서는 19세 때 할아버지한테 시집을 가셨지만 결혼한 지 2년 만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21세의 어린 나이에 혼자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를 잊지 못하셔서 재혼도 안 하시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위해 30년 넘게 지방공무원인 보육원 교사를 하시면서 생계를 유지하셨다. 오랫 동안 교육현장에서 직장여성으로서 열심히 일을 하셔서 그런지 다양한 정보와 넓은 시야를 가지고 계셨다. 정년퇴임을 하신 후부터는 기회가 될 때마다 해외에도 가시고 단 셋인 손주를 위해 많은 정보를 얻어서 수많은 체험을 시켜주셨다. 그런 할머니 덕분에 나는 한국에 오기 전에 이미 넓은 세상과 접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대학 4학년이 되던 1994년, 나는 교환학생으로 중국 상해에서 1년 동안 유학을 하게 되었고, 내 남편은 나보다 반년 먼저 상해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었다. 외국인 기숙사에서 살게 된 내가 배정을 받은 방은 320호였고, 남편이 살았던 302호실과는 끝과 끝에 위치했었다. 하지만 작은 우연이 겹치면서 우리는 옆방, 그리고 같은 교실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고, 그렇게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 이 양국간의 역사적 배경 때문에 남편은 많은 고민을 했었다고 나중에 얘기해 주었다. 많은 한국 사람들처럼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나는 한국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대표음식이 김치라는 것과 전통의상이 한복이라는 것, 그리고 알고 있던 한국어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가 전부였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어학연수기간이 끝나서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아직 학생이었고 그를 많이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가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솔직히 우리의 관계를 계속 지속시켜 나갈 자신이 없었다. 남편도 그렇게 느껴서인지 나랑 같이 한국에 가보지 않겠냐고 나에게 제안했다. 학교가 방학이기도 했고 그가 자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궁금하기도 해서 나는 그를 따라 한국에 가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대한민국 땅을 밟게 되었다.
내가 대한민국에 도착한 그 날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날은 바로 북한의 김일성이 세상을 떠난 날이었기 때문이다. 김포공항에서 공항버스를 타고 대구로 내려가는 길에 그 소식이 들려오자 버스 안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그 당시에는 뉴스를 알아들을 수도 없었고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가 아니었기에 갑작스러운 소식에 조금 불안했지만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아 그대로 한국에 머무르기로 했다. 단 일본에 계시던 부모님께서 많이 걱정을 하셨다.
한국에 가보니 왠지 낯설기도 하고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했다. 같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나라라 생김새도 크게 차이가 없는 듯하였다. 내가 처음 한국에 온 1994년에는 여성들 사이에 슈퍼모델들의 스모키화장이 유행하고 있어서 어두운 립스틱을 칠한 사람들이 많아서 조금 무섭기도 했다. 그리고 밥상을 보고도 놀랐다. 소재의 맛을 중요시하는 일본음식은 소재 그 자체의 색깔이 남아 있지만 갖가지 양념으로 간을 하는 한국 반찬들의 색깔은 대부분이 빨간색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일본사람이면서 고추냉이나 겨자는 원래 못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고추가 들어간 매콤한 음식은 좋아했다. 그래서 내가 한국에 시집을 온 후 친정어머니가 “너는 원래 한국에 시집을 갈 운명이었나 봐.”라는 농담을 하실 정도였다.
친정어머니 말씀대로 나는 한국에 올 운명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하느님께서 나를 한국에 불러주셨던 것일까? 하지만 아직 그 시점에서의 나는 낯설기도 하고 낯익은 것 같기도 한 이 대한민국으로 시집와서 딸, 아들을 낳고 산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 이번 호부터 이나오까 아끼 님의 글이 연재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나오까 아끼 님은 현재 프리랜서로 통역 및 가이드로 활동 중이며, 비산성당에서 8년째 교리교사를 하고 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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