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최초의 수덕자로 존경 받고 있는 농은 홍유한 어른이 계신 봉화 우곡으로 차를 달렸다. 다덕약수터를 지나 조그맣게 우곡성지라고 표시되어 있는 푯말을 보고 북쪽으로 꺾어진 좁은 도로를 따라 올라가니, 도로 양편 과수원에는 한입 깨물고 싶은 탐스런 사과가 주렁주렁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매달려 있는 모양이, 마치 어린이들이 엄마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연상하게 했다.
얼마를 올라갔을까? 우곡성지에 다다르니, 왼편 위쪽으로 교육관(피정집)이 보이고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니 사제관 뒤로 조그마한 성당이 서 있다. 성당에 들어서니 제대 뒤편 감실에 감실 등(燈)불이 발갛게 켜져 있었다. 수차례 여기를 찾을 때마다 나를 반기는 성지의 모습은 늘 새로운 말씀과 편안함을 주는 곳이다.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조배를 드리면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세례도 받지 않았으면서도 오로지 교리서에 의존하여 하느님의 진리를 깨닫고 그 깨달은 바로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수계생활을 하신 어르신의 고결한 삶을 상상해 보았다.
묘지로 가는 길은 야트막한 계곡이 흐른다. 그곳을 건너가려면 철재로 만든 조그마한 다리를 지나야 한다. 그 가는 길목에 냇물이 하도 맑아 졸졸 흐르는 내에 내려가 손을 담그고 맑은 물을 마셔 보았다. “아! 시원하다, 아! 맛있다.” 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농은 홍유한(洪儒漢, 1726-1785) 어르신의 묘는 성당 건너편 동쪽에 위치해 있는 문수산 자락 중턱에 모셔져 있어 올라가는 길 왼편, 오른편으로 10여 미터 혹은 20여 미터 간격으로 돌로 14처가 만들어져 있어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할 수 있어 오르는 동안 힘들이지 않고 묘지가 있는 곳까지 닿을 수 있었다.
묘지에 당도하여 절을 두 번하고 한국 최초의 수덕자(修德者)께 “어르신의 신덕을 전구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올리고는 올라왔던 길을 내려다보았다. 발아래 펼쳐진 풍광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또 고즈넉했다. 소백산과 태백산이 마주하는 산줄기를 뻗어 나간 얕고 오밀조밀한 산봉우리가 모두 이곳 홍유한 어르신의 묘를 향하여 읍(揖)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마치 대전에서 신하들이 임금을 향하여 엎드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 이곳이 바로 명당이로구나, 정조가 궁중 풍수를 보내어 명당을 찾아 선생님을 모시게 하였다고 전해진 바가 거짓은 아니로구나.” 바로 이 명당에 안장된 묘지로 인하여 풍산 홍씨 가문의 후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순교자의 월계관을 쓰게 만들었구나!
비록 홍 선생께서는 세례를 받지 못했지만 교리가 가르치는 대로 한 달을 7일씩 쪼개어 7일, 14일, 21일, 28일을 주일로 정하고 집안일을 도우는 모든 사람들을 쉬게 했으며 소재(단식)일과 대재(금육)일을 몰랐기 때문에 언제나 좋은 음식이 있으면 피하고 절제하며 신앙생활을 하였으니, 참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귀감이 되고도 남을 분이 아니시던가! 그분께 절식하는 까닭을 물으면 언제나 “모든 음식은 먹기에 좋은 것이지만 마음과 눈은 언제나 가장 좋은 것으로 향해 있으며 욕심은 나쁘기 때문에 그것을 억제하려 하고 있다.”고 웃으면서 대답하셨다지.
선생께서는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나 열여섯 나이에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성호 이익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셨고 일찍부터 실학과 서학 등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때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등 천주교 서적을 접하여 연구하여 그때까지 유학에서의 어떤 서적과 경전에서도 찾아보지 못했던 “진리(眞理)”를 깨달았으니 어찌 진정한 신앙의 선구자라고 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몸소 이 진리를 실천하기 위하여 서른한 살에 서울을 벗어나 충남 예산 여촌(餘村, 여사울)으로 낙향하여 18년 동안 많은 제자들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며 살다가 연구한 교리를 신앙생활로 옮기기 위하여 1775년에 홀로 가솔들을 이끌고 소백산 기슭인 영주 구구리 구들미 마을로 옮겨와 본격적으로 수계생활을 시작하셨다. 선생께서는 수계생활을 하시면서 언제나 이웃에게 온정을 베풀고 길을 가다 노인이나 병약한 사람을 만나면 자기가 타고 가던 우마에 태워 주고 자신은 진흙탕을 걸어가면서 버선과 옷들이 다 젖었지만 조금도 힘들어 하지 않았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팔았던 밭이 산사태로 소실(燒失) 된 것을 알고 다시 물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가 어리거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도 언제나 겸손하게 대하고 주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했다고 하니 놀라울 수밖에 없다. 그러한 삶이 1785년 선종하실 때까지 계속 되었다고 하니 후세 신앙인들이 어찌 본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안동교구에서는 어르신의 선종 210주년 되는 해인 1995년 묘비를 새로 단장하고 십자가의 길을 만들었다. 2005년 9월에는 성지 입구에 높다란 십자가와 동상을 세우고 두봉 주교님과 안동교구 사제단 및 교구 신자들과 그분 후손들이 보는 가운데 축복식을 거행했다. 이날 두봉 주교님께서는 “홍유한 선생은 세례를 받은 신자보다 더 훌륭한 신앙인답게 사셨던 것을 기억하고, 우리도 그분이 살아가신 것처럼 항상 양심있고 올바른 생활을 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이 기쁜 축복의 날, 어느 사진작가가 촬영한 사진에는 하늘에서 후손들이 있는 자리로 햇빛과 같이 빛이 쏟아지는 모습이 마치 하느님께서 축복해주시는 손길처럼 모든 이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이러한 현상이 들어 있는 사진은 지금도 성당입구 왼쪽 벽에 걸려있고 또 작은 사진으로 현상되어 이곳을 찾아오는 모든 순례자들에게 그날의 찬란한 모습을 떠올리도록 하고 있다.
지난 2009년 5월 29일 안동교구 설정 40주년 기념일에는 기록에 남아 있는 홍유한 선생과 후손 순교자 13위(位) 현양비 제막과 묘지조성예식에 필자도 참석하는 영광을 누렸다. 특별히 후손 순교자들 가운데에는 두 분의 성인(홍영주, 홍병주)이 계신다. 이분들의 유해는 찾을 길이 없어 문중 후손들이 순교지에서 정성스럽게 파 온 흙을 옹기에 넣어 묘역을 조성하여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신 그분의 재종질(再從姪) 홍낙민(洪樂敏) 루카를 비롯하여 열두 분의 후손 순교자 가묘 안장과 순교자 현양비 제막 기념 미사는 신앙인의 후손으로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주님을 향한 새로운 열정과 각오를 가져주기에 충분한 은총의 시간이 되었다. 미사 중 영성체후 묵상곡으로 성가 ‘228번 <성인 찬미가>’를 노래하는 큰 영광도 함께 얻었다.
지금도 의연하게 서서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는 그날의 [순교자 현양비]에는 이러한 글귀가 우리를 반겨주고 있다.
“농은 홍유한(1726~1785년)선생으로부터 비롯된 풍산 홍씨 문중의 신앙적 가계는… 이 땅에 그리스도교 복음의 씨앗을 내리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모든 신앙인들에게 가히 귀감(龜鑑)이 된다.… 이리하여 이곳은 농은 선생의 묘소뿐만 아니라 풍산 홍씨 가계 13위 순교자들을 한 자리에 모심으로서 천주교 신앙의 족적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곡의 골짜기는 이곳을 찾는 신앙인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신앙의 골짜기, 거룩한 땅, 성지(聖地)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 이번 호부터 ‘성지에 가다’가 연재됩니다. 박철수 님은 경산성당 신자로 관덕정순교기념관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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