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신앙의 해 및 월간 〈빛〉 30주년 기념 신앙수기공모전 입선 수상작 ③
그리스도의 사랑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이경욱(안드레아)|사동성당

 내가 존경하고 사랑했던 우리 아버지 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17세에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천재였지만 정말로 가난한 시인이었다. 어머니와 결혼하기 위해 어쩔 수없이 세례를 받은 아버지는 나일론 신자로, 1996년 11월 7일 당신 나이 마흔 아홉에 주님 품으로 돌아가시는 날까지 성당에 가신 적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한 번씩 어머니의 권유로 성당에 가셨지만 가던 길에 어머니와 싸워 미사는 커녕 집에 돌아와 횡포를 부려 우리 가족은 늘 공포에 떨곤 했다. 아버지께서 그리도 가기 싫어하셨지만 미사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성당이었다. 나의 소박한 꿈 - 내가 커서 어른이 되어 성당 다니는 여자랑 결혼해서 아이들과 함께 손잡고 성당에 나가는 꿈 - 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꿈이 현실이 되어 버린 지금, 이것은 ‘소박한 꿈’이 아니라 엄청나게 큰 주님의 은총이란 걸 깨닫고 있다.

중학생 때 등록금을 납부하지 못해 방과 후 늘 선생님께 불려 다녀야 했던 누님이 집에 와서 속이 상해 울던 모습, 셋방살이를 하는 동안 빚쟁이들이 찾아와 30대 중반인 어머니에게 욕을 하던 모습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가진 것이 없어도 어머니는 당신 자식들에게 올바른 신앙을 물려주고자 가난한 삶 속에서도 늘 기도하셨고, 특히 새벽마다 성모님 앞에서 바치던 묵주기도 소리와 두 개의 촛불은 지금까지 쉽게 잊히지 않는 참 좋았던 어릴 적 기억이다.

가난에 찌들어 남은 건 신앙의 힘과 악 밖에 없던 어머니는 늘 나에게 “욱이 니는 어떤 일이 있어도 성당 빠자 묵으면 안 된데이. 그때는 니 죽고 내 죽는 줄 알거라.”고 하셨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나였지만 한 번은 전자오락에 넋이 나가 미사에 빠졌고 집에 와서 행동거지가 이상했던 나의 모습에 낌새를 차리신 어머니는 성당에 빠졌다는 이유로 야구방망이로 초등학교 5학년인 나를 인정사정없이 때리셨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으셨는지 벽을 보고 꿇어 앉아 손드는 벌을 세우셨고 밥을 무기화하여 저녁을 굶기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동학대로 신문에 날 법도 하지만 그때 나는 ‘아, 내가 정말 성당에 빠지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지금까지 42년 동안 단 한 번도 냉담하지 않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고 주님께서 주신 두 자녀에게 신앙교육의 든든한 뿌리가 되었다.

가난한 시인인 아버지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가 주님 품으로 돌아가셨다. 가난한 시인이자 나일론 신앙을 가진 남편과 신앙의 힘 하나만으로 평생을 사셨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7년째 되는 지금까지도 연금이 나오는 날이면 아버지의 연미사 예물을 매월도 아니고 매주 바치고 계신다. 게다가 칠십 평생동안 하느님을 모르고 사셨던 당신의 시모이자 우리 할머니 김 수산나 여사를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주님의 자녀로 만들었다. 할머니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다가 주님의 품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매주 할머니의 연미사 예물을 바치시며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고 계신다.

2010년 1월, 나는 서덕교(야고보) 본당주임신부님의 권유와 본당의 선배 꾸르실리스타의 기도 속에 서른여덟이라는 젊은 나이에 꾸르실료를 수료했다. 그곳에서 만난 예수님은 나에게 공짜로 신앙을 물려주신 어머니 이 아녜스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함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셨다. 그리고 그동안 단 한 번도 나의 꿈속에 나타나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꿈속에서 ‘안드레아, 엄마가 나를 위해 미사봉헌을 많이 해주어 예수님께 간다. 엄마한테 고맙다고 전해다오.’라고 하신 것을 듣고 잠에서 깨어 미사의 위대함과 은총을 체험하였다. 곧장 어머니께 전화를 드려 꿈 내용을 전해드리자 어머니의 말씀이 가관이다. “영감쟁이, 웃긴다. 미사는 내가 봉헌했는데 와 니 꿈속에 나타나노….” 우리 천주교 신앙은 죽은 이를 위해서도 기도해 줄 수 있기에 나는 지금도 항상 연옥영혼을 위해 기도드린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가톨릭학생회(Cell)를 했다. 가톨릭학생회를 하면서 여자고등학교와 회합이 자주 있었고, 고등학교 1학년 첫 회합 때 첫눈에 반한 여학생이 있었다. 나는 그 여학생이 나의 선배들과 같은 성당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그 선배들을 따라 성당까지 옮기는 용감함을 보였다. 그 당시 소심했던 나는 미사 때 먼발치에서 그 여학생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러다가 한두 번 선배들을 따라 나오다보니 자연스럽게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고 그 친구들과 함께 주일학교 학생회도 열심히 했다.

그 당시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참 멋져 보였다. 자상하게 이름을 불러주시며 밝은 미소로 우리를 대해주시는 모습이 참 좋았다. 그때 나는 대학생이 되면 꼭 교리교사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나의 20대는 군 생활을 빼고 모두 주일학교 교리교사를 하면서 보냈다.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내가 첫눈에 반했던 그 여학생도 교리교사를 했기에 더욱 관심을 가지며 할 수 있었다. 나는 신앙학교, 성탄예술제, 교리수업 등을 준비하면서 단 한 번도 힘들다고 느낀 적 없이 늘 재미있고 행복했다.

신앙이 모든 삶의 중심이었던 어머니께서도 학교생활은 뒷전이고 성당에만 푹 빠져 지내는 아들이 속으로 걱정도 되셨겠지만 교리교사생활을 전적으로 격려해 주시고 늘 힘이 되어 주셨으며, 나일론 신자였던 아버지도 성당에서 하는 봉사만큼은 믿어주시고 경제적인 지원도 아낌없이 해 주셨다. 나의 주일학교 교리교사생활은 참 좋았고, 행복했고, 보람도 많았다. 그때 그 시간들이 지금 나의 신앙생활에 이렇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리라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주님은 나를 정말로 사랑하신다. 젊은 청춘을 주일학교에 쏟아 부은 나의 모습을 너무 예쁘게 봐 주셨기에 IMF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실직자가 넘쳐났던 1999년에 나는 다들 부러워하는 공기업에 한 번에 합격하게 되었다. 지금 곰곰이 묵상하며 돌이켜보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루카 12,29)’는 복음말씀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사실 취업시험을 준비하면서 열심히 기도했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간절히 청했던 것 같다. 게다가 주님은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결혼’이라는 선물까지 주셨다. 고등학교 때 첫눈에 반했던 여학생인 지금의 아내와 내가 청춘을 바쳐 교리교사를 했던 만촌성당에서 우리는 2000년 10월 29일 혼배성사를 통해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 부부에게 미카엘라와 다미아노라는 두 명의 자녀를 선물로 주셨다.

두 아이 모두에게 태어난 지 100일 선물로 유아세례를 받게 하였고 지금은 초등학교 생활보다 성당 주일학교 생활을 더욱 열심히 하며 우리 부부를 기쁘게 해준다. 엄마, 아빠가 학교에서 받는 우등상보다 더 좋아하는 상이 주일학교 개근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들은 복사와 미사해설, 그리고 소년 레지오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즐기고 있다. 성당에 그렇게 다니기 싫어하셨던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어릴 적 내가 가졌던 소박한 꿈(성당에 다니는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들 손잡고 성당에 나가면서 성가정을 꾸미는 것)이 절대 소박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엄청난 사랑과 은총임을 깨달으면서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포항에서 근무하다가 2005년에 고향인 대구로 발령이 나면서 사동성당으로 교적을 옮기게 되었다. 성당에서 배운 게 주일학교밖에 없는지라 나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2007년부터 사동성당 주일학교 교장을 맡고 있다. 우리 천사들과 교리도 하고 신앙학교도 가고 물놀이도 하고 스키장도 가면서 20대 때에 느꼈던 재미와 보람을 지금 다시 느끼고 있으며 이 천사들로 인해 40대가 된 지금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람과 행복을 느끼고 체험하고 있어 매우 감사할 따름이다. 천사들의 노랫소리가 가득한 어린이미사의 감동은 경험하지 못한 신자들은 절대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매주 토요일에는 최대한 어떤 약속도 잡지 않고 주님께 감사한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주일학교 천사들과 교리교사들과 함께하려고 한다. 그리고 청소년미사가 끝나면 중학생들의 레지오가 있다. 늦은 시간이라 나도 가끔씩 귀찮을 때가 있는데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참석하여 성모님의 군대를 자청하는 중학생 친구들을 보면서 신앙인으로서, 어른으로서 모범을 보여야겠다고 다짐한다.

내가 주일학교에 몸을 담은 지도 11년이 되었다. 강산이 한번 변했고 모든 것이 많이 바뀐 게 사실이다. 그래서 늘 이맘때가 되면 ‘올해도 주일학교 교리교사생활을 계속할까? 하지 말까? 어떻게 할까?’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신앙수기를 적는 이 순간, 나는 결심한다. ‘강산이 한번 더 바뀔 때까지, 이왕 시작한 거 20년 동안 주일학교에 몸담자!’ 지금까지 주님께 받은 은총과 사랑에 보답하고 미력한 힘이나마 “젊은이 복음화”에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노력해보련다. 그래서 우리 청소년들이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느끼고 맛보고 깨닫도록 땀을 쏟아 보아야겠다.

뱃속에서부터 예수님을 알게 해주신 어머니 이 아녜스 여사와 사위가 걱정없이 주일학교 교장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여러가지로 도와주시며 외손자의 사제성소를 위해 성경 전체를 두 번째 쓰면서 늘 기도해주시는 든든한 후원자 김 론지노 장인어른, 그리고 은 알비나 장모님, 어릴 적 함께 교리교사를 했기에 항상 묵묵히 내조하며 본인도 미사반주와 소년꾸리아 단장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아내 김 카타리나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드린다.

딸 미카엘라가 첫영성체를 받을 때 정한 우리 집의 성경가훈은 예수님에 대한 성모님의 순종과 순명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이다. 우리 부부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으로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그 분의 사랑에 보답하려고 한다.

 

* 2014년 2월 호에는 입선 수상자인 차영자(율리안나) 씨의 작품이 실립니다. (가나다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