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이 부부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즉 성의 목적이 서로의 사랑의 표현과 출산이라는 점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성의 영성적인 차원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하는 새롭고 능동적인 패러다임을 창조해야 한다. 그리고 아마 그것에 대한 장벽은 성을 하느님의 선물로 보기 보다는 병리학적인 자세로 취급하는 태도일 것이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진실한 모습과 상대에게 품고 있는 마음을 표현하기보다 흔히 이렇게 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의 아름다움을 확인하기보다는 성적인 죄를 피하고 금욕적 생활을 옹호하는 편견에 치중한 규율을 통해서 성행위를 통제하려 한다.
한편으로 상업주의는 성의 영적인 면을 회피한 채 개인적인 쾌락의 수단으로 성을 전락시켜버렸다. 그 결과 이제 성은 정서적인 모험의 감행도, 생명 창조의 잠재적 가능성으로부터 단절된 채 그 상징적 의미를 박탈당해버렸다.
성에 대한 이런 왜곡된 현상에 맞서기 위해 교회는 지나치게 권위적이며 부정적인 성윤리에 대한 가르침을 가함으로써 사람들이 성에 대한 모든 것을 죄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하고 말았다. 사실 사람들이 지나치리만큼 성을 죄스러운 무엇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성적이기 때문에 죄가 아니라 육적으로 살고 사랑하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이다. 부부 사이에 좋고 빈번하며 서로에게 즐거움을 주는 성은 성찬례가 교회 공동체에 꼭 필요하듯이 혼인의 성소에 필수적인 것이다.
성의 성사성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활력을 주는 경험으로써, 한 사람의 삶을 영광스럽게도 소모적이게 할 수 있는 육체적인 갈망으로 사람을 휘어잡는다.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성은 삶이 제공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감동적인 경험이다.
심리학자들은 ‘혼인의 친밀도’에서 부부 성관계의 질은 전반적인 관계의 질에 따르며, 전반적 관계는 서로간의 대화의 질에 따르고, 그 대화의 질은 얼마나 그들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며 귀 기울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이 이론을 역으로 생각해보면 성은 혼인관계의 내적인 성질을 밖으로 드러내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이 혼인의 육체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유일한 측정 도구는 아니더라도 종종 서로를 위한 반응과 희생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 비록 교회가 수도생활 모델에 의거한 영성에 초점을 맞추며 부부들을 위한 영성을 발달시키지는 못했지만 혼인생활은 영성적인 삶이자 거룩한 삶이다.
혼인한 사람의 거룩함은 혼인 자체에서가 아니라 사랑의 부름에 성실히 응답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각각의 성사는 은총을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상징이 있고 혼인의 상징은 성적인 친밀함 속에서 완전히 하나가 된 부부간 사랑의 삶이다. 교회는 혼인이 성적으로 완결될 때 유효한 성사적 일치가 이루어진다고 가르치는 것은 이 점에서 의미심장한 것이다. 성적 교류는 부부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으로 이끈다. 그러므로 혼인의 영성은 부부의 성적 교류를 깊게 하는 데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부부간의 성적 교류는 사랑을 단순히 표현하고 상징하는 것만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에게 파고들 때 사랑을 창조하고 육체적 친교 속에서 영혼을 창조하는 것이다. 유일한 두 개인으로서 서로에게 완전한 선물이 되어주는 것이며, 두 사람은 육체와 영혼이 하나가 되는 경험 속에서 그 하나 되는 느낌을 나누기를 갈망하게 된다.
부부가 함께 나누는 사랑은 자연히 자녀를 갖는 방향으로 옮겨가게 된다. 부부 사랑이 자랄수록 그들 사랑의 외부적 표현으로써 아이가 큰 의미를 가지게 된다. 아이는 하느님으로부터 부부가 받는 특별한 선물이며 그들 자신이 확대된 것이다. 제삼자에 대한 소망은 부부가 그들의 하나 된 사랑을 삶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 할 때 계속된다.
성적인 친밀함
부부간의 성이 사랑을 상징한다면, 부부의 성은 사랑을 가르치는 학교가 된다. 부부들이 성관계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주는 것을 배울 때 삶의 다른 분야에서도 자신을 나누어 주게 되며, 이런 시간과 노력을 믿게 되어 결국 신뢰가 증가하게 된다.
성사적인 부부는 일생을 친밀한 상태에서 산다. 이 친밀함은 성적인 교류를 통해 특별한 방법으로 얻어지고 알려진다. 약점을 서로 나누는 가운데서 사람들은 배우자가 그들 존재의 가장 깊은 단계에서 자신과 함께 있음을 알고 그들이 아는 유일한 방법의 관계로 변화된다. 이런 친밀함은 서로의 심리적 존재를 마음을 열고 나누는 것이며 이는 이타적인 사랑과 서로에 대한 관심, 상대방의 선을 즐기는 마음에서 얻어진다. 친밀함은 성행위 이상의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이성의 사람과 하나가 됨으로써 완성되고 보충될 필요가 있다. 깊은 즐거움을 주는 사람 곁에 있고 싶다는 욕망은 성사적 혼인 안에서의 성적 교류의 상징인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것을 ‘혼인의 육체적 의미’라고 했다. 함께 하는 매일의 생활에서 부부들은 자신을 버리는 사랑을 하고 그것은 성적 교류에서 정점을 이룬다. 성적 즐거움의 황홀함은 자신을 넘어선 경험이며 바로 하느님을 맛보는 것이다.
성의 영적인 면을 판단하는 기준은 나눔의 차원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이익을 바라는 것이다. 사랑이란 ‘당신을 위해 내가 무얼 할까?’혹은 ‘당신을 위해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을까?’라고 묻는 것이다. 부부가 성행위의 친밀함을 즐길 때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과의 친밀함으로 이끄는 성사가 된다. 그러나 성의 영적인 면은 먼저 우리가 영적으로 변화되고 성으로서의 우리 존재를 삶의 모든 부분과 통합시키지 않는 한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영적 삶을 의식하지 않고서 또 우리 인간이 완전하게 되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성장시키지 않고서는 결코 성관계가 우리를 사랑의 충만함으로 이끌지 않는 것이다.
성사에 사용되는 상징들은 성사의 의미를 규정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성은 혼인에 있어서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배우자를 하느님과 함께 하는 내적 생활로 이끄는 효과적인 삶의 방식인 것이다. 성행위는 부부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평범한 일이 될 때는 쉽게 짜증스럽고 좌절감을 줄 수 있다. 성사적인 성은 상호간에 관대하고 자기희생적인 관심, 평등한 관계에서 상대방을 생각하는 존중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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