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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 마리애 체험사례
주님, 30년이 걸렸습니다!


유무근(바오로)|계산주교좌성당, 성모성심 Cu. 단장

젊은 시절 군 복무를 마치고 직장을 다닌 저는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승진에 낙오되어 대구로 발령을 받아 10년 간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그 퇴직금으로 형님께서 경영하는 주유소의 소 사장제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신규 거래처 확보를 위해 업체를 타진하던 중 저를 변화시킨 큰 별을 만났습니다. 가르멜 여자 수도원에서 지병으로 퇴원하여 목욕탕을 경영하며 평생 동정녀이신 그분은 지금 제 아내의 대모님이십니다. 여러 해가 바뀌는 동안 아내의 대모님 설득으로 결국 저는 천주교를 인정하고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대모님은 묵주기도와 평일미사, 레지오 활동이 인생의 전부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 대모님의 모범적인 신앙생활이 저를 개종하게 만들었고, 1980년 아내의 대모님 주선으로 당시 이홍근 바오로 신부님과 면담한 후,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신자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주님의 감격스러운 은총이 계속되어 당시 82세의 아버지를 전교하여 6개월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교리반에 동반 출석해서 이듬해 세례를 받으신 아버지께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10년 후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계산주교좌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올렸습니다.

아버지께서 임종하기 일주일 전부터 박계순(마더데레사) 대모님과 홍명련(데레사), 박남식(논나) 할머니, 위령회 김한기 회장님과 우리 가족들이 함께 하면서 아버지의 마지막을 주님의 나라로 인계하였습니다. 그분들은 매일같이 오시어 말문이 닫히신 아버지 귓전에 반복되는 복음말씀을 들려주고 가셨습니다. 그 정성에 혼신의 힘을 다해 아버지께서 하신 “고맙습니다.”라는 말에 우리는 감격하여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버지, 듣고 계셨군요.”라며 울음을 삼켰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에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이렇듯 부모님께서는 사후에도 한 동무가 되어 천국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위안이 되었습니다.

성체를 모시면서 가슴 깊이 우러나는 은혜, 만져 볼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며 오직 체험으로만 느낄 수 있는 사랑의 신비! 저는 성체를 처음 모실 초창기 시절, 말 못할 고민 때문에 힘든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세례를 받은 후에도 주일이면 교회와 성당을 번갈아 다니고 있었습니다. 교회 목사님의 관심과 배려 때문에 차마 성당으로 개종했다고 말하려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목사님께서 중매도 해주시고 결혼식 주례도 직접 해주시고 몇 주 후에는 집사 직분도 기정사실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마음을 먹고 교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날 오후 저의 집에는 목사님과 사모님, 많은 신도들이 찾아와서 기도와 찬송가를 부르고 가셨습니다. 참으로 진퇴양난이었습니다. 성당에서 교회로 두 계절을 쳇바퀴 돌리듯 다녔습니다.

타 본당에서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이 중요한가? 사람이 중요한가?”라는 신부님의 호된 질책과 꾸지람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던 저는 드디어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사하자! 당장 기습 이사를 하자! 저는 이사를 했습니다. 해가 바뀐 훗날 시내 지하도 입구에서 우연히 목사님과 마주쳤습니다. 저는 빚쟁이를 만난 듯 오금이 붙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저에게 “유무근 성도님! 성도님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하고 가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1980년 저는 정의의 거울 쁘레시디움에 입단하여 이듬해 쁘레시디움을 분단하여 단장직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1981년 또래 쁘레시디움 3개를 합하여 ‘바오로회’를 창단, 초대 회장을 맡았습니다. 직장 등 한창 활동할 나이로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이 쉽지 않아 두 달 동안 본당의 30대 신자 명단을 들고 직장 및 가가호호 방문을 하여 입회동의서를 받아 대상자 80명 중 26명의 회원을 기도와 성령의 이끄심에 힘입어 드디어 ‘바오로회’를 창단하였습니다. 젊은 열정으로 뭉친 우리는 본당 경로잔치, 미사안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본당 방문 시 경호를 담당했습니다. 당시 김경환(토마) 주임신부님께서 감사패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2년 후 제가 새로 시작한 사업에 몰두 하다 보니 회합에 불참하는 경우가 잦아졌고 바오로회는 활성화 되지도 못한채 결국 창단 2년 만에 고사하고 말았습니다. 분대장이 없는 레지오마리애, 중대장이 없는 바오로회는 어렵게 만들어졌지만 선장의 안이함으로 금방 좌초되고 말았습니다. 좌초된 이후 쁘레시디움 단원과 바오로회 회원들 가운데에는 젊은 나이에 뇌경색, 중풍, 간질, 치매 등의 건강상 장애를 입기도 했고 세상을 떠난 젊은 회원도 있었으며 사업을 하던 두 단원은 부도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고통와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사업 부진으로 모든 소유품들이 경매로 넘어가고 품위 따위는 내동댕이 쳐졌습니다. 저는 ‘주님을 외면하고는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구나.’라는 것을 한참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해인사로 피신했다가 대축일 미사 때만 끌려나오는 냉담생활이 10년이나 이어졌고 숨을 쉴 수 있을 때까지는 15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던 중 대부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시고 평소 대부님처럼 존경하던 김종득(시몬) 형제의 진실된 권유로 다시 원점인 정의의 거울 쁘레시디움에 입단하여 이듬해인 2001년 또 단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꼭 해야 할 과제가 생겼습니다. 잃어버린 쁘레시디움을 찾자! 내가 잃어버린 ‘신비로운 그릇’ 쁘레시디움을!

만약 또다시 직무유기 하여 이탈한다면 그 결과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성모님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만신창이가 된 저에게 동료 단원들처럼 큰 아픔을 주어서라도 회두시킬 수 있었으나 묵묵히 기다려 주셨습니다. 저는 10여 년 동안 외유하고 피골이 상접한 채 집으로 돌아온 탕자였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아버지께서는 꾸지람은 아니 하시고 어머니와 함께 반가워하시며 외투와 의식주는 물론 필요시 언제든 쓸 수 있는 직불카드(성령님)를 가슴속 깊숙이 넣어주셨습니다. 성령과 함께 변화되어 가는 제 자신을 가슴으로 느끼며 돈은 없어도 마음은 늘 풍요로웠습니다. 저는 한티순교성지, 연화리 단계교육, 꾸르실료 교육이 있을 때마다 연말까지 아니면 부활절까지 잃어버린 쁘레시디움 복구에 수없이 허원했습니다. 9명이던 단원에서 15명을 목표로 많은 예비단원이 거쳐 갔지만 적응이 어려웠나 봅니다. 시간과 정성과 비용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2011년 선교위원장에 재선되어 직접 인도한 새 입교자 5명과 함께 예비신자 성지순례안내, 신영세자 환영식 진행을 맡으면서 하느님께서 저에게 절호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대부 맺기, 대부모 주선, 단체가입 권유를 통해 여러 번 친교시간을 가졌습니다. 연령대에 맞추어 형제자매 쁘레시디움, 제단체에 가입을 시키고 50~60대 연령을 우리 쁘레시디움에 입단시켜 단원이 21명으로 늘어 났습니다. 몇 명의 단원들은 유고도 있었지만 돌아오리라 믿으며 훅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터질세라 애지중지하여 10월초 행동단원으로 선서를 하였습니다.

50년 동안 이어온 정의의 거울 쁘레시디움 선배단원들이 존경스럽고 33년을 함께 해 온 친형제같은 끈끈한 정, 분가의 아픔과 희열이 교차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작은 소임을 다 했으니 다른 임무를 주셨습니다. 선교위원장을 내려놀고 새로 창설된 ‘성모신심 꾸리아’의 초대 단장직을 주신 것입니다. ‘너의 임무는 오직 선교다!’ 우선 102명의 행동단원을 주셨습니다. 저는 천주교 선교사양성, 단원교육과 행동단원 배가운동에 소임을 다 하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2013년 10월 중순, 70대와 60대로 분가하여 첫 주회를 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그토록 갈망하던 첫 주회에 가슴이 벅차고 함께 자리한 성령께 축축한 눈시울로 말했습니다. ‘주님! 제가 잃어버렸던 신비로운 그릇 쁘레시디움을 드디어 복구하는데 30년이 걸렸습니다. 주님께서 넣어주신 직불카드를 보관하고만 있지 않고 선교로 보속을 치르겠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