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에는 어머니를 떠나 보낸 아픔이 가슴 시리게 밀려와 종종 눈물이 되곤 한다. 어머니는 생전에 오남매의 뒷바라지를 위해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맨 전사였다. 힘든 농사일로 피부는 까맣게 타들어갔고 손등은 고목의 표피처럼 거칠어졌다. 이른 새벽이면 종종걸음으로 집을 나서는 농군이었다. 자식들이 성장해 쉬어도 될 나이임에도 채소를 가꾸어 장에 내다 팔고 꽃을 가꾸며 날마다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하는 것을 낙으로 삼으셨다. 자신의 팔순 잔치는 인근 노인복지시설을 찾아 그들에게 당신 손수 잔치를 베풀어 주셨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자 젊은 시절에 고생한 탓인지 자주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뇌졸중 이후에는 관절염까지 겹쳤다. 고혈압, 협심증 같은 합병 증세는 건강을 극도로 악화시켰고 무릎 관절이 약해지면서 자주 넘어지곤 했다. 아내와 상의한 끝에 시내의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마을로 이사를 했다. 하지만 한해에 두 번이나 척추 수술을 받아야 할 만큼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 신세를 지는 횟수가 점점 많아졌다.
치매증세도 심해져 가족들을 불안하게 했다. 언어의 폭력은 어떤 무기보다도 잔인했다. 가끔은 맑은 정신으로 돌아오곤 했지만 지나간 일은 까맣게 몰랐다. 아내와 딸은 충격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그 증세는 밤이면 더욱 심해져 감당하기 힘들었다.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운 나날이었다. 와중에 부정맥이 심한데다 동맥이 막혀 연이어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았다. 기력이 쇠해진 모습을 볼 때마다 눈물을 훔쳐야만 했다. 맑은 눈망울만 그대로일 뿐 몸은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갔다.
퇴원을 앞두고 병실을 동생 부부에게 맡긴 채 청송 주산지를 찾았다. 낮게 드리운 잿빛 하늘에 불어오는 골바람은 마음을 스산하게 했다. 잎을 떨군 채 물에 잠긴 왕버들은 동면에 들었는지 비단잉어들의 유혹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최후를 맞는 왕버들이 어머니 모습과 흡사했다. 시커멓게 타들어간 둥치에 앙상한 가지를 한 채로 비스듬히 누워있다. 생과 사가 공존하는 주산지에는 나와 아내, 어머니의 삶이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었다.
어머니는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요양병원으로 모시기로 했지만 아내만 극구 반대했다. 어머니를 집에 모시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거라며 집으로 모시자고 했다. 대소변을 직접 처리하는 것도 큰일이지만 밤샘 간호를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고생을 자처하는 아내가 고맙고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우리부부 침대 옆에다 어머니를 모셨다. 육신은 제대로 가눌 수 없었지만 정신만은 맑았다. “얘야,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구나. 그동안 속이 많이 상했제?” 그 말에 당황한 아내는 “제대로 못해 드렸는데… 용서하세요. 어머니….”, “니는 정말 내한테 잘했다.”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너만 있으면 된다며 어머니는 계속 아내만 찾았다.
하루에 여덟 번씩 변을 봤지만 아내는 그럴 때마다 싫은 내색도 없이 맨손으로 씻겨드렸다. 천사 같은 아내를 허락해 주신 주님께 날마다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어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묵주기도 대신 “주님, 주님 곁에 갈 때가 되었으니 어서 데려가 주십시오.”를 반복했다. 신부님께서 종부성사를 주신 후 어머니는 감은 눈을 뜨지 않으셨다. “말셀라 할머니! 방 신부입니다.” 평소보다 더 다정한 신부님의 목소리였지만 어머니는 미동조차 않으셨다. 그렇게 어머니는 잠든 듯 편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으셨다. 자식들의 울음을 뒤로 하고 본향으로 가신 것이다. 떠나 보낸 그 자리가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 약력 : 2005 「수필과 비평」 등단, 대구광역시 자원봉사수기부문 대상수상, 현재 대구 수비작가회의 회장, 대구 수필문예회 부회장, 대구시청문학회 부회장, 대구문협, 달성문협회원, 대구가톨릭문인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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