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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노래를 주님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
-1791)‘교회 소나타(Sonate


박수원(프란치스코 하비에르)|교수, 오르가니스트

 

모차르트, 참으로 친숙한 이름이다. 평소에 음악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사람들조차 ‘아는 사람인데…’ 라며 나서게 하는 힘이 있다. 태교에 열성적인 젊은 엄마들은 그의 음반을 걸어놓고 뱃속의 아기에게 정겨운 말을 건네기도 하고, 심지어 목장의 젖소들도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기분 좋게 우유를 짜낸다고 한다. 간혹, 유럽 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이 뽐내듯 내미는 빨간 금박에 싸인 초콜릿은 별반 다를바 없이 그저 달콤할 뿐인데도, 모차르트의 초상화가 근엄하게 붙어 있다는 이유로 더욱 특별해 보이기도 한다. 도대체 그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우리가 이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모차르트는 미숙아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의 부모는 이미 위로 세 명의 아이를 잃어은 경험이 있어서, 노심초사한 마음으로 바로 다음 날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성당에 가서 세례를 받게 했다고 한다. 요즈음처럼 병원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을 터, 그저 주님의 보살핌으로 아무 탈 없이 자라나기를 바라면서 아마데우스(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런 간절한 기도 덕분인지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고, 세 살이 되자 하늘이 내린 큰 재능의 싹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건반악기에 아장아장 다가가서, ‘도-미’, ‘레-파’, ‘미-솔’, 이렇게 화음을 찾아가며 놀고 있는 아이! 평범한 부모라면 그저 웃고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궁정 음악 감독으로 있었던 아버지 레오폴드의 눈에는 세 살배기의 놀이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때부터 건반악기를 가르치고, 악보를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는데,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모든 것을 너무 쉽고 빠르게 습득하는 것을 보며 유명 작곡가였던 아버지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네 살 남짓한 꼬맹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연주를 해치우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아무튼 아들의 작곡실력이 늘수록, 상대적인 열등감 때문인지 아버지는 점점 더 음악에서 손을 떼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모차르트가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이 뛰어난 아들을 잘츠부르크 대주교님 밑에서 교회음악을 담당하는 음악가로 밀어 넣었다. 장차 자신의 뒤를 이어 안정된 직장인 궁정음악 감독으로 키울 소박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히에로니무스 대주교가 당시 유행하던 오페라 스타일이 영성생활을 방해하는 난잡한 음악이라 생각하여 오페라 공연을 금기시하고, 미사 중에도 음악부분 모두를 합쳐서 45분 이상 넘어가지 못하도록 기준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말씀에 충실한 엄격한 신앙을 추구했던 대주교님의 방침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또 요즈음 미사와 비교해볼 때 그래도 음악이 넘쳐나는 풍성한 분위기라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당시 모차르트에게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음이 분명하다. 오페라를 쓰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미사를 가득 채우고 싶었을 테니 말이다. 그는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사직서를 제출해도 받아주지 않고, 반항을 해도 대주교님이 놓아주지 않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공허하게 발버둥을 치는 일이 여러 번 반복되다가 결국 대주교 집무실 문지기로부터 엉덩이를 걷어 차이는 수모를 겪으면서 쫓겨나는 상황에 이른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보살핌 아래 있었던 어린 신동의 삶에서 벗어나 비로소 음악가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 무렵 모차르트가 남긴 작품 중에 17개의 교회 소나타가 전해지고 있다. 이는 미사 중에 제2독서와 복음 사이에 화답송 대신 연주되던 짧은 음악으로 바이올린 둘, 첼로 하나 정도의 작은 편성으로 2-3분 남짓 펼쳐지는 단출한 음악이다. 그 맛깔스러움이 듣기에 참 좋긴 하지만, 발로 차인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잘츠부르크 궁정을 떠나는 어린 사춘기의 모차르트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아서 묘한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