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단내 성가정성지를 찾게 된 것은 단내 성가정성지 담당으로 부임하신 신부님으로부터 연락을 받고서였다. 그때가 2000년대 초 봄이었다. 신부님이 알려주신 대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덕평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좌회전을 한 후 2㎞ 가다가 삼거리에서 또 좌회전을 한 다음 다시 2㎞ 가서 다리를 건너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단내 성가정성지였다. 지금은 잘 발달된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면 더 쉽게 찾아 갈 수 있다.
그 후로 몇 차례 방문하는 동안 성지가 제 모습을 갖추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아주 짧은 기간에 성지 조성이 다 되었다. 그것은 바로 기적적인 일이었다. 성지 입구 와룡산 위에 세워진 예수성심상은 양팔을 크게 벌리시고 우리를 맞이해 주시고 작고 아담하게 꾸며진 성당, 광장 위 한가운데 놓여진 아름다운 회색의 연푸른 빛깔의 옥으로 만든 커다란 제대, 성가정성지를 상징하는 성가정상, 순교자 묘지 입구 아래편에 세워진 다섯 분의 성인을 기념하는 5위 성인 순교비 등 이 모든 것이 몇 년에 걸쳐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몇 개월 만에 다 이루어지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들이었다. 성전 봉헌식 때 봉헌식을 주례하신 수원교구장 최덕기 주교님께서 이러한 사실에 대해 세 번씩이나 기적이 일어난 곳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불모의 터전에서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대성전의 완공을 비롯해서 많은 일들이 성취된 것은 오직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이 이루신 업적”이라고 강론 중에 말씀하시면서 단기간에 성지가 완공된 것에 대해 경하를 아끼지 않으셨다. 단내 성가정성지는 그렇게 지금의 모습 대로 아주 훌륭한 성지로 가꾸어졌다.
경기도 이천 단천리에 있는 단내 성가정성지는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백지사로 순교하신 정은(바오로, 1804~1866년)과 정(베드로, ?~1866년)의 고향이자 유해가 묻혀 있는 곳이다. 기록에 보면 이곳 단내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교우촌으로, 한국 교회가 창립되던 1784년 이전부터 천주교가 들어와 있던 곳이다.
예수성심 상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건너보이는 ‘동산 밑 마을(동산리)’은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중 한 분이신 이문우 요한(李文祐, 1809~1840년) 성인의 고향이다. 또한 단천리는 한국 최초의 사제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이천지역의 어농, 은이, 동산 밑 마을 등을 사목하시던 중요한 사목지로 당시 다녀가시던 오솔길이 무덤 왼편 오방이 산모퉁이에서 흔적과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특별히 이곳을 성가정성지로 조성한 것은 여기 이천에서 태어났거나 체포되어 순교하신 다섯 분의 성인을 기념하기 위함인데 이문우 성인 외에 모두 가족 순교자이다. 정은(바오로)과 정 베드로는 할아버지와 재종손자 사이, 이호영(베드로, 1802~1839년)과 이소사(아가다, 1784~1839년)는 남매, 조증이(발바라, 1782~1839년)와 남이관(세바스티아노, 1780~1839년)은 부부이다. 이렇게 가족들이 함께 순교하신 것을 기념하고 신앙 선조들의 훌륭한 순교신앙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이곳을 성가정성지로 지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족들이 함께 이곳을 순례하면서 성가정을 이루기 위한 기도를 하면 두 분의 순교자께서 전구해 주실 것이다.
고향땅 단내 성가정성지에 묻힌 정은 할아버지와 재종손자인 정 베드로의 기막힌 신앙생활과 순교의 길에 대해 정은 순교자의 증손자인 정규랑(1882~1952년) 신부는 저서 「정씨가사(鄭氏家史)」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언제 성교회 들어오셨냐 하면 등창을 앓으시는 중 그것을 치료하러 오시는 양지(陽智) 은이 벌터에 사는 조(曺)사옥, 성진 씨에게 문교(聞敎)하시고 온 집안 식구가 다 같이 입교하였다.’ 등창을 앓으시고 입교하신 때는 기해박해 이전인지 이후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병오박해에 순교하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으로부터 성사를 받은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천주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일가친척들, 동네 사람들, 친구들로부터 혹평과 비난, 멸시를 감수해야 했으며, 더욱이 천주교 신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시국에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성사를 주러 항상 한밤중에 오셔서 “정생원, 정생원, 김 신부께서 성사 주러 오셨으니, 주저말고 나오시오.” 이웃이 알까 ‘쉬쉬’하면서 신부를 영접하여 들이고 고해성사를 받으려 예비하는 중 벽에 종이 한 장을 붙이고 고상을 그 위에 모셔 걸고 10여 명의 고해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신 후에 다시 배매실공소로 가시는데, 그와 같이 하시고 은리공소로 가시면 날이 샌다 하시며, 고해성사를 받을 때에 신부의 권면, 안위하시는 말씀이며, 복사의 제성(提醒), 권면하시는 말씀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고, 또 일가와 동리 사람들의 비평과 박대에 위로를 얻지 못하던 차에 성사를 받고 권면안위를 받으면 누가 감동하여 열심치 아니 하리오? 떠나시는 신부를 따라나서 전송하려 하면 신부께서 진심껏 만류하시며 “내가 이렇게 밤을 타서 교우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내 조심도 하며, 교우들에 대한 외인(外人) 이목(耳目)도 조심하기 위하여 이렇게 밤에 다니는 것이니, 부디 나오지 말고 집안에 조용히 있으라.” 하고 떠나신 다음 그래도 잠시 있다 오방이 산모퉁이까지 나가보면 벌써 얼마쯤 가셨는지 종적이 없어 섭섭하게 돌아올 뿐이었다.>

이 기록을 묵상해 보면 당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삶 자체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상상해 볼 수 있다. 이것뿐이랴! <일가친척들의 비평과 인근 친구들의 능욕을 들어가며 성교(聖敎) 봉행(奉行)하여 오기를 20여 년, 병인년 군난을 당하게 되었다. 천주학꾼이 여기저기서 잡혀갔다. 사정없이 죽인다, 가산을 있는 대로 빼앗아 간다 하는 등 별별 소문이 들려오고 일가들의 비난이 자자하니, 혹 어떤 사람은 친한 척하며 조용히 와서 “일가들 앞에서 배교를 하고 책을 불사르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병인년 음력 11월 13일 포교 다섯 명이 그를 잡으러 석양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줄 정은은 깜깜하게 모르고 있었는데, 그 주막주인이 몰래와서 “지금 샘골댁 노생원님을 잡으러 와 있으니 빨리 몸을 피하십시오.” 일러주었는데 전혀 피할 생각을 하지 않으시고 의연하게 잡혀서 64세의 쇠약한 몸으로 70여 리의 험한 산길을 포교들에게 끌려가 그 다음 날에야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도착하였다. 할아버지께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재종손인 정 베드로는 “나도 할아버지를 따라가 같이 치명(致命)하겠다.” 하시며 자헌(自獻)으로 따라가서 한 날, 한 시에 같이 치명하셨으니 자헌치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정은 할아버지와 정 베드로는 1866년 11월 13일 광주(경기도) 포교들에게 체포되어 남한산성 감옥에 25일간 구류되어 갖은 옥고를 다 치르고 형초(刑招)를 받고 마지막으로 배교하기를 강요당하였다. 그때 ‘배교하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살려 보냈는데도 ‘죽어도 배교할 수 없다.’ 하여 마지막으로 처형 직전에 한 번 더 배교하기를 강요했지만 그때도 “절대로 배교할 수 없다.”고 굳건한 신앙으로 순교하시었다.>
당시 천주교인을 처형하는 데에는 매로 때려 죽이는 장살형(杖殺刑), 칼로 목을 베는 참수형(斬首刑), 목 매달아 죽이는 교수형(絞首刑) 등이 있었는데 대원군 때는 너무나 많은 천주교인들을 잡아 죽이게 되므로 포졸들이 사람을 죽이는 데 진저리를 내게 되어 조용하게 죽이는 방법 중에 하나로 얼굴에 물을 뿌려 그 위에 백지를 발라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白紙死)가 유행하였다고 한다. 이 백지사는 얼굴에 종이를 도배질한다 하여 일명 도배사(塗褙死)라고도 하는데 정은(바오로)과 정 베드로는 바로 이 도배사를 당하여 병인년 음력 12월 8일 순교하신 것이다.
순교를 자청하시는 그분들의 순교신앙은 이성적인 판단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죽음, 죽음의 그 순간을 초자연적인 힘, 바로 하느님을 향한 강하고도 굳센 믿음을 통하여 주시는 특별한 은총(恩寵)의 크나큰 선물일까? 아마도 신앙 선조들께서 매일 바치는 향주삼덕(鄕主三德)의 기도를 통하여 신앙심이 더욱 튼튼해지고 한 차원 높은 훌륭한 영성적인 신심의 결과일 것이리라.
* 박철수 님은 경산성당 신자로, 관덕정순교기념관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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