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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오까 아끼의 한국살이 ②
나의 결심


이나오까 아끼(줄리아)|비산성당

상해에서 만난 지금의 남편을 따라 대한민국의 땅을 밟은 나의 첫 소감은 “왠지 낯설기도 하고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 건물이나 자동차들…. 그런데 그렇게 느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상해에 살았던 1994년의 중국은 지금과 달리 아직 한참 성장하고 있던 시기였다. 건물을 짓는 것도 기계보다 지게를 진 사람들의 힘으로 지어졌었고, 당연히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몇 배나 더 많았다. 전기나 상하수도시설도 아직 충분히 발달되지 않아서 그나마 대우를 받고 있었던 외국인기숙사도 정전이 되거나 단수가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물가도 많이 쌌다. 길가에 파는 만두 하나의 가격이 150원 정도였던가? 아무튼 상해에서 반년이나 살다가 온 나에게 대한민국은 음식도 내 입맛에 맞았고 교통도 발달한 아주 살기 좋은 나라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중국에서 유학을 하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남편과 일본에서 만나 처음으로 한국으로 왔었더라면 한·일 간의 문화적 차이에 아마도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내가 처음 중국에 가서 살았을 때 문화적인 차이를 느꼈을 때 많이 놀랐던 것처럼…. 다행히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차이는 중국과 일본의 그것보다는 훨씬 적었다. 집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고 바닥에 앉는 생활, 맵기는 하지만 비슷한 음식이 많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 입맛에 잘 맞았다. 그렇게 한국에 와서 2~3일을 지내보니 문득 ‘평생 중국에서 살려면 힘들겠지만 한국이라면 살 수 있을 것 같아.’라는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때 대학교 4학년 학생으로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남편은 달랐다. 내가 한국에 머무는 동안 온갖 친척집에 다 데리고 다녔다. 나는 깊이 생각을 안 했지만 남편은 그 때 이미 나와 결혼까지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는 채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으며 한국여행을 만끽했다.

남은 방학을 보내러 일본에 돌아가는 날, 남편은 김포공항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비행기에 타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자꾸만 눈물이 났다. 그런데 그 눈물은 멀리 떨어져서 연애를 하는 사람들이 당분간 못 만나게 되어 아쉬워하는 그런 의미보다는 지금 헤어지면 우리의 관계가 끝나고 두 번 다시 만나지 못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으로 기억하고 있다. 지금처럼 SNS나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기에 외국인끼리 연애를 하는 것, 그리고 지금은 흔한 국제결혼이 그 당시에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인 데다가 엄두도 안 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반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부모님께서 걱정하실까봐 집에 가서는 한국에 놀러 간 이유를 말씀드리지 않았고, 그저 상해에서 알게 된 한국 친구집에 머물면서 맛있는 것을 먹고 즐겁게 구경을 다녔다는 얘기만 했다.

그런데 내가 일본에 돌아간 그날 저녁부터 한국에 있는 남편한테서 매일 국제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국에 있는 친구가 집에 잘 들어갔는지 궁금해서 전화를 한 것 같아요.”라고 어떻게든 넘어 갔는데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다음 날도 계속해서 걸려오는 국제전화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부모님께 숨길 수 없었다. 그래서 사실대로 상해에서 같이 공부를 하고 있는 한국남학생이랑 사귀게 되었고 그가 한국에 돌아가게 되어서 그 사람이 태어난 나라를 직접 보고 싶어서 한국에 다녀왔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그날 저녁에도 어김없이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고 남편에게도 부모님께 말씀드렸다는 것을 알렸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그는 “그럼, 나 곧 일본으로 간다!”고 하더니 비자를 발급 받자마자 말 그대로 일본행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

그의 행동력에 나도 놀랐지만 우리 부모님은 더더욱 놀라셨다. 남편이 일본어를 못해서 나는 부모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중국어로 통역해서 남편에게 전달하고, 또 남편이 하는 말을 일본어로 통역해서 부모님께 전달하는, 말하자면 흔히 레크리에이션에서 보는 전달게임처럼 대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의 중국어 실력이 완벽하게 의사소통을 할 정도의 수준이 아니기에 지나가는 중국 사람이 우리의 대화를 들었다면 아마도 히죽거렸을 것이다. 짧은 기간 동안 남편에게 나의 고향인 교토와 오사카 구경을 시켜주고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남편이 가고 나서 아버지께서 “그 사람은 참 성실하고 괜찮은 사람이구나.”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비록 부모님과 남편이 서로 말이 통하진 않았지만 우리가 진지하게 만나고 있다는 것을 부모님께서도 인정해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웃어른들을 대하는 한국의 예절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고 나중에 말씀해 주셨다. 예를 들어 차에서 내릴 때 문을 열어 드린다거나 어른들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행동 등 일본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예의 바른 모습이 부모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모양이다. 이렇게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난 뒤부터 시간적, 경제적 요건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우리의 관계는 계속되어 갔다. 나의 대학교 졸업식이나 일본의 설날에도 남편은 시간을 내어 와주었다.

만난 지 1년쯤 지났을 때 우리 사이에 구체적으로 결혼 얘기가 나와서 부모님이랑 얘기를 하게 되었다. 재일교포들이 많이 사는 칸사이지방(교토, 오사카, 고베 부근)의 은행에서 오래 근무하신 아버지께서는 재일교포 손님들과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그 분들에게 물어서 한국사회에 대해 미리 알아보고 계셨던 것이다. 그 분들은 아버지께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재일교포들은 요즘 제사 같은 전통적인 의식을 간소화해서 간단하게 하고 있지만 본토에서는 아직 친척들과의 관계도 깊고 전통을 이어가는 풍습이 깊이 남아 있다. 그래서 우리 교포들 사이에서도 본토에 시집, 장가를 보내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그 얘기를 듣고 아버지께서는 마음속으로 걱정을 많이 하셨다. ‘국제결혼을 시키더라도 차라리 재일교포한테 시집을 보냈으면….’하는 생각도 하셨다. 재일교포면 국제결혼이라고 해도 생활방식이 우리랑 그리 차이가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나에게 “네가 한국에 가서 살아갈 자신만 있다면 시집을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나는 그 때만 해도 한국에 대해 잘 몰랐고 아직 어렸기 때문에 ‘살면 살지 뭐! 못 살 이유는 없지!’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아버지께 한국에서 잘 할 자신이 있다고 대답을 했다. 참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이 딱 나한테 맞는 말인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그 해 봄, 부모님이랑 같이 한국을 방문한 후 초가을에 남편이 부모님을 모시고 일본에 와서 상견례가 이루어졌고 우리의 결혼식 날짜가 1996년 2월 3일로 정해졌다. 그리고 결혼식

 

에 앞서 12월 2일에 남편이 다니는 비산성당에서 관면혼배를 받았다. 그 때의 나는 나의 남편이 될 사람이 장손이라는 것도, 1년에 제사가 여섯 번이나 있다는 것도, 시할머니, 시부모님, 시동생이랑 같이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등등

아무것도 모르는 채 고향을 떠나 이 대한민국 대구에서 살아 가리라는 크나큰 결심을 했던 것이다!

 

 

 

 * 이나오까 아끼 님은 현재 프리랜서로 통역 및 가이드로 활동 중이며, 비산성당에서 8년째 교리교사를 하고 있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