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남편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롱비치 호화유람선 승무원이었다. 승무원 유니폼을 차려 입은 남편의 키 크고 잘생긴 외모는 누가 보아도 멋있었고, 외국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호화유람선에서 한껏 멋스런 생활에 젖어 있는 남편 뒤에는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찌들은 아내가 있었다. 어쩐 일인지 여러 해 동안 생활비를 한국으로 부쳐 주지 않았던 남편은 어쩌다 가끔 안부 전화나 편지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홀시어머니와 아이 셋을 혼자서 부양하는 것은 참으로 힘들었고 날마다 전쟁이었다. 쪼들리는 살림살이에 집세를 내는 날이면 불안하고 무서웠다. 봉지쌀과 새끼줄에 매달린 연탄 한 장을 사기 위해 이웃이 볼세라 늦은 밤 가게를 다녀오곤 했다. 그 시절 나의 가장 큰 소원은 쌀 한 가마니와 연탄 100장을 갖고 사는 일이었다. 아침이면 아이들이 달라는 각종 학비며, 중학생 아들의 차비마저도 늘 걱정이었다.
거기에다 더 참기 힘든 것은 젊고 고운 며느리가 바람이 날까 봐 눈총을 주는 시어머니의 심한 구박이었다. 그런 시어머니마저 췌장암에 걸려 수술을 받아야 했다. 다음 해 서울의 큰 병원에서 전신에 전이가 되어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급 전보를 받고 다급하게 남편이 귀국했다. 출국한 지 5년 만에 본 남편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완전 빈털털이였다. 당신 아들이 보내 준 돈을 내가 다 탕진해 버리고서 거짓말을 한다고 나에게 애꿎은 말만 하시던 시어머니는 초췌한 아들의 몰골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셨다. 당당하던 시어머니의 기죽은 모습이 오히려 더 내 가슴을 아프게 했던 것은 왜였을까. 당신 아들의 못난 모습이 바로 내 남편인 것을, 처음으로 시어머니와 마음이 일치한 것이다. 측은했다. 젊어서 혼자 되어 남편에게 받지 못한 정을 외아들에게 쏟았으나 호강 한번 받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시어머니의 모습이 내 가슴을 저리게 했다.
시어머니가 영면하시던 날, 서른다섯 살의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가시는 길이 평안하시길 기원하면서 책에서 익혀둔 대로 정성을 다해 직접 염습을 했다. 시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5년 동안 카지노에서 수천만 원을 날려 버린 남편은 꿇어 앉아 울며 나에게 용서를 빌었다. 결코 다시는 포커에 손대지 않고 가족만을 위해 살겠다며 나를 달랬다. 하지만 그 달콤한 헛맹세를 굳게 믿었던 순진한 아내를 두고, 계속 포커에 손을 떼지 못한 남편이었다.
32년의 타국 생활을 끝내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일흔 살 노인이 되어 남편은 귀국했다. 가족을 떠나 외롭고 힘든 타국 생활에 남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런데 그이의 몸속에 큰 암 덩어리를 키우고 있었다는 걸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검사 후 신장암 3기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1년 반의 투병생활 동안 서울 S병원을 수없이 들락거리며 갖은 지청구를 듣고도, 간호에 여념이 없던 아내에게 표현하지 못할 억지를 부리며 괴롭히던 남편이었다. 얼마나 아프면 그럴까 싶다가도 독설을 퍼부을 때는 인내도 한계에 다다랐다. 억울해서 밖에 나와 가슴을 치며 하늘에 계신 엄마를 부르며 통곡하기도 했다.
암담한 현실에서 내가 의지 할 수 있었던 위로처는 위로자신 주님뿐이었다. 기도 속에서 ‘이것도 사랑이다. 그래도 사랑이다.’라는 말을 소리내어 되뇌었다. ‘나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를 수십 번도 더 외치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모경을 외우며 가슴을 가라앉혔다. 그 기도를 귀담아 들으신 걸까?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을 예감했던 남편이 흘리던 눈물을 잊지 못한다. 그날 남편이 병자성사를 자청한 것이었다. 그 눈물 속에 주님의 눈빛이 맑게 빛나고 있었음을 난 보았다. 비로소 남편은 편안하게 주님의 집으로 안주한 것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세례를 받은 나는 중학생들로 구성된 ‘천사의 모후’ 쁘레시디움을 지도하며 일주일에 닷새는 성당에 가서 살았다. 얼마나 주님이 좋았던지 스물두 살 때 프랑스인 안 베드로 주임신부님께, 수녀원에 가고 싶으니 추천해 달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신부님은 “율리안나는 엄마로서 성소가 더 있어요. 결혼해서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우는 것도 천주님의 뜻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때에는 내 신심이 약해 보였나 싶어서 매우 서운하기까지 했다. 수녀가 될 줄 알고 청혼을 못한 총각이 있었을 정도로 난 주님 안에 살았었다.
그 당시 교제 중이던 남편은 나와 혼배를 위해 급하게 서울에서 세례를 받았고, 그 해 가을 죽도성당에서 혼배성사를 받은 후 직장 때문에 서울에서 살았다. 태어 난 지 한 달 된 첫 아들이 유아세례 받던 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시어머니는 당신 아들은 절에서 불공 드려 낳은 아들이니 성당에 가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셨다. 청천벽력이었다. “그럼 왜 처음부터 반대하지 않으셨어요?”하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여쭈어 보았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내 아들이 죽자고 너만 좋다는데 난들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고 하셨다. 두 시간이 넘는 긴 혼배미사를 아들을 위해 견디신 분이셨다. 시어머니는 귀한 외아들의 무사안일이 우선이었다.
그후 과일과 쌀 보따리를 들고 시어머니를 따라서 사월 초파일과 동짓날에 절에 갈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법당에 들어서면 혼란스러워서 눈물이 쏟아졌다. 제대와 큰 고상이 내 앞에 훤하게 비춰졌다. 큰 죄를 짓는 것 같아 어쩔줄 몰랐다. 주일만 되면 성당에 가고 싶었지만 십계명에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했으니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어머니 생전에만 참자고 다독여 주었다. 그러나 막상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수십 년 동안 냉담에 익숙해진 나는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성당을 멀리 했었다. 성당 앞을 지나칠 때면 성모상을 쳐다볼 수가 없어서 애써 외면하기까지 했다.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 학비와 생활비를 위해 보험설계사로 정신없이 뛰어 다녀도 살기가 팍팍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헤매고 살았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결코 놓지 않으셨다. 내가 냉담하고 있는 동안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두 딸이 스스로 입교하여 ‘소피아’와 ‘라우렌시아’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어미의 방황과는 상관없이 주님 안에 든 두 딸의 세례가 나에게는 가책과 아울러 기적처럼 느껴졌다. 당신이 준비하신 대로 이 날부터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족 재정비 사업을 시작하셨다. 2009년 5월 큰 딸이 혼배성사를 받을 때 주례신부님은 영화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고 이태석 신부님의 형님이신 이태영 신부님이셨다. 그 또한 큰 은총이었다. 이 신부님은 한국의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에서 파견되어 6년 동안 미국 캘리포니아주 토렌스에 있는 프란치스코 한인성당에서 사목하고 계셨다.
3대째 천주교 집안인 사돈을 만나게 된 것도 나와 딸에게 은혜로운 선물이었다. 그분들의 적극적인 권유로 우리 부부는 사제관에서 눈물의 고해성사를 보았다. 40년의 긴 방황을 끝내고 아름답게 훨훨 날아오른 영광의 날, 그때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서 오너라. 너는 내 품에 다시 돌아온 내 딸이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너무나 큰 감동과 감격이었다. 서럽던 지난 삶을 곱씹으며 딸을 끌어안고 제대 앞에서 한없이 눈물을 쏟았다.
오랫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어리를 내려놓은 듯 이 홀가분한 기분, 무거운 십자가를 함께 지고 온 사랑스러운 내 딸, 하느님께서는 내 딸을 통해서 나의 십자가를 훌훌 벗겨 주셨다. 그랬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잊고 살았던 이 탕아를 버리신 적이 없었다. 한동안 미사 때마다 뜨거운 눈물이 자꾸만 났다. 그 광경을 본 두 딸이 “울보엄마에게 성령님이 임했나 보다.”하고 놀렸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지난 해 두 가지 큰 은총을 또 주셨다. 하나는 남편의 장례미사에서 감동을 받은 친정 조카가 ‘클레멘스’로, 조카사위가 ‘요셉’으로 8월 15일에 세례를 받고 질녀 마리아와 성가정을 이루었다. 또 지난 성탄절에는 시누이의 막내딸이 세례를 받았다. 참으로 대견하고 예뻐서 자청하여 대모가 되었다. 대녀 아녜스와는 영적으로 교류하며, 신앙생활을 굳건히 잘 하도록 매일 기도와 지도를 아끼지 않는다. 다음 선교 목표는 절에 다니다가 쉬는 시누이를 전교할 생각으로 벌써부터 가슴이 콩닥거린다.
또 하나는 남편이 잠들어 있는 죽도성당 지하의 봉안당에 매달리신 예수님상은 우리부부가 혼배성사를 받을 때 바로 그 예수님상이란 것을 발견한 일이었다. 놀라웠다. 예수님은 그 무거운 십자가를 40여 년 동안 메고 내 질곡의 길을 함께 걸어오신 것이었다. 혼배성사를 주셨으며, 43년 만에 먼 길을 돌아와 이제는 고향집에서 편안히 쉬는 그 사람, 내 남편 스테파노를 품으시고 지켜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절묘한 방법으로 우리 가족을 묶어 주셨다.
내 생애에 겪은 온갖 고통은 하느님께서 주신 벌이 아니라 어쩌면 내 스스로가 만든 벌일 수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고통이 나의 삶에 큰 자양분이 되었다는 것을, 더 큰 기쁨을 주시려고 ‘시련’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단련시킨 것이라고 이제는 절절하게 느낀다. 내 어리석음에 가려져 있던 당신의 실체를 환하게 볼 수 있도록 곰삭힐 기간을 마련해 주시고 무한히 기다려 주신 사랑의 하느님이셨다. 기쁨으로 가득 찬 요즘, 매일이 기적이며 축복이다. 살아온 삶, 살아갈 나의 삶, 모두를 하느님께 기쁘게 봉헌한다.
우수가 지난 요즘 메마른 가지에 물이 오른다. 곧 봄이 오려나 보다. 매화망울이 한껏 부풀어 있다. 내 신심의 밭에도 꽃망울을 터트릴 봄을 가슴 두근거리며 기다린다. “주여, 저를 도구로 써 주소서. 이제야 귀향했나이다.”
* 3월 호에는 입선 수상자인 황정숙(율리아나) 씨의 작품이 실립니다. (가나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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