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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마음으로 세상보기
핑계는 무덤(끝났다)이다!


하성호(사도요한)|주교대리 신부, 제1대리구장

 우리 교구는 2년마다 한 번씩 홀수 해 가을에 본당 사목평의회 구성을 새롭게 한다. 하지만 본당 총회장을 비롯하여 간부를 뽑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본당 사목자가 사목의 활성화를 꾀하기 위해 적임자라 보이는 교우에게 간부직을 맡아 달라고 청하면 상당수 교우들이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주님께서 보내실 만한 이를 보내십시오.”(탈출 4,13)라는 모세의 핑계를 되풀이하려 한다.

하지만 시끌벅적한 길거리에선 “집사님! 권사님!”하며 부르는 큰소리가 자주 들리고, 환한 얼굴들이 유명 연예인처럼 눈에 들어오니 참으로 기분이 묘해지기도 한다. 개신교에선 감사헌금까지 듬뿍내면서 서로 감투(?)를 맡으려 한다던데, 우리 교우들 가운데는 간부 맡으라 하면 교적 옮기겠다고 엄포(?)까지 놓으니, 기분이 몇 곱으로 더 묘해진다. 혼자 조용히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됐지, 왜 자꾸 성가시게 구느냐고 얼굴까지 붉힌다.

그래서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라는 속담이 왜 생겨 났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이 속담을 단순하게 “핑계는 무덤(끝났다)이다!”로 고치고 싶어졌다. 왜냐하면 핑계는 궁극적으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고, 그런 핑계는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이 끝장날 때까지’ 핑계를 집요하게 부르기 때문이다. 가정이든 성당이든 구성원들이 ‘자기책임’을 회피하면 그 가정이나 성당은 어떻게 되겠는가? 단호하게 말한다면 “끝났다!”이다.

가족 구성이 5명인데 3명이 자꾸만 ‘자기책임’을 회피하고 핑계를 대면 그 가정은 60%가 “끝났다!”이고, 성당에서 10명에게 간부직 제안을 했는데 6명이 책임을 맡기 싫어 핑계를 대며 간부직을 거절한다면 그 성당은 60%가 “끝났다!”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성당에선 그래도 그 직무를 맡을 수 있겠다 싶은 교우에게 간부직을 제안하는 것을 감안하면 “끝났다!” 수치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현재 본당사목을 위해 간부직을 맡은 모든 교우 여러분께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린다.)

이 어렵고 부정적인 사목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과 신원의식을 확고하게 가지는 일이 급선무이다. 신앙인의 정체성은 우리의 욕망과 욕심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식으로 바꾸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인인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동화(同化, assimilation) 되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 13,14),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 “여러분은 …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콜로 3,9-10) 우리가 그리스도께 동화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를 위해 자신에게 맡겨지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궁색한 핑계를 되면서 미꾸라지가 될 수 있겠는가?

생각이 이쯤에 다다르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 무엇이 ‘우선순위’일까를 새삼스레 곱씹어 보게 된다. ‘우선순위’를 “다른 것에 앞서 매겨진 차례나 위치”라고 국어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신자는 자신의 생활에 있어 ‘신앙과 관련된 일이’ 모든 생활의 ‘우선순위’이어야 할진데, 교우들 가운데 과연 몇 %가 그렇게 생각할까? ‘신앙과 관련된 일’에 바치는 시간과 열정, 책임은 쥐꼬리만 한데 받고자 하는 복(福) 욕심은 왜 그리도 많고 큰지!

“성당에 봉사하러 가야 하기 때문에, 그런 모임에 참석할 수 없어!”라고 하면서 걸려온 세속유혹(?) 전화를 단호하게 끊는 신자를 만나면 왜 그렇게도 행복한지! 2013년도에 인기가 높았던 ‘굿닥터’라는 드라마에서, 수련의가 담당교수에게 “선생님은 어떤 의사가 좋은 의사라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음을 던진다. 교수는 “어떤 의사가 좋은 의사일까를 고민하는 모든 의사!”라고 답한다. 나는 즉시 “어떤 신부가 좋은 신부일까?”라고 자문하여 보았고,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그 물음을 나 자신에게 던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교우들도 “어떤 신자가 좋은 신자일까?”라는 물음을 늘 스스로에게 던지며 신앙생활을 하면 좋겠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 교우들도 “어떤 신자가 좋은 신자일까를 고민하는 모든 신자!”라고 스스로 대답하는 “좋은 신자”가 되도록 하자.

“행복한 사람이여, 불신자들이 꾀하는 말을 그는 아니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망나니들 모임에 자리하지 않나니, 차라리 그의 낙은 주님의 법에 있어, 밤낮으로 주님의 법 묵상하도다.”(시편 1, 1-2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