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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 가다 - 순교자 윤봉문 요셉 성지
“이 거룩한 순교자를 저는 친밀하게 알았습니다.”
- 김보록 신부 보고서 中에서


박철수(보니파시오)|경산성당

경상남도 거제도 국사봉 아래 옥포 쪽박골(足舶谷)에 모셔져 있던 윤봉문(尹鳳文, 요셉, 1852~1888년) 순교자의 묘를 작년(2013년 4월 20일)에 거제도 지세포에 위치한 1만 5천여 평의 대지 위에 순교자의 묘지를 이장하여 새로운 성지로 조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국가에서는 1886년 한불수호조약이 맺어지면서 천주교에 대한 공식적인 박해가 끝나고 난 이후에 순교하신 분이라 고 다른 순교자에 비해 좀 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한번 순례하고 싶던 차에 캄보디아에서 해외 선교를 하고 있는 도미니카 수녀(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가 피정을 위해 한국에 나온 길에 그 가족들과 함께 거제도를 가게 되었다.

일행은 아침 9시경 서부정류장에서 통영행 버스를 타고 먼저 출발하고 필자는 일과를 마치고 저녁 늦은 시간에 승용차로 수성 IC를 통과해 신부산고속도로를 타고 부산에서 거제도로 이어지는 수심 34m 가덕 해저터널을 지나 거가대교를 지나갔다. 거가대교에 만들어진 조형물에 비춰진 아름다운 조명으로 이국적인 느낌을 받으며 조선산업이 활발한 거제도와 도로망이 잘 만들어져 있는 교각 위를 통과하면서 ‘우리나라가 참 잘 사는 나라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지난번에는 구마고속도로를 이용하여 3시간 넘게 걸렸는데 이번에는 신부산고속도로로 2시간 정도 걸려서 지세포 앞바다에 조그마한 호수처럼 이루어진 조그마한 만(灣)이라고 할 수 있는 경치 좋은 위치에 거제조선해양문화관과 이웃해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지세포성당을 찾아 이장한 순교자 묘지로 가는 길을 알려 달라고 하니 순교자 묘지 관할지역은 지세포성당이지만 묘지관리는 옥포성당에서 하고 있다면서 얼마 전 성지를 찾는 이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약도가 있다며 복사해 주었다. 고마움의 인사를 하고 “빛 잡지”를 선물로 주고 약도를 따라 출발했다. 성지까지는 약 1㎞ 정도로 지세포성당과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성지 입구에 들어서니 100여 평쯤 되는 주차장이 시멘트 포장으로 만들어져 있고 임시로 사용할 수 있는 컨테이너 관리사무실이 있는데 성지 조성 추진위원회 강권수(요한 보스코) 사무국장이 나와서 일을 보고 있었다. 강권수 사무국장에게 성지를 이장하게 된 경위와 현재 조성 중인 사업에 대해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순교자 윤봉문 요셉 성지”라고 쓰여진 3m 정도의 자연석 표식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느 성지나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성지가 십자가의 길부터 시작하거나 혹은 로사리오의 길을 만들어서 그 기도가 끝나면 순교자의 묘지나 성지의 가장 중요한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곳도 역시 십자가의 길부터 안내를 하고 있다. 좀 특이한 것은 키가 30여 미터나 되고 둘레가 어른 손으로 두 뼘으로도 잡히지 않는 굵고 곧은 대나무 숲이 앞을 가로 막으면서 제1처를 시작하게 만들어 놓았다. 제5처까지 대나무 숲이었는데 기도하는 동안 순교자의 꺾이지 않고 부러지지 않는 신앙처럼 꿋꿋한 목소리로 “나는 결코 천주를 배반할 수 없소.” 라고 외치는 소리가 필자의 약한 신심을 꾸짖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5처를 지나니 제6처부터는 대나무 숲이 끝나고 큰 키를 자랑하며 하늘을 찌를 듯이 곧게 자란 일명 ‘노송나무’라 불리는 편백나무 군락지가 제14처까지 이어졌다. 가파른 경사는 아니지만 제14처까지 올라오는 동안 힘들어 했던 당신의 자녀들에게 편백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로 가장 깨끗하게 정화시킨 맑은 공기와 해변가의 풍부한 오존과 함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몸과 마음속에 있는 모든 노폐물을 토해내도록 선물로 주신 것 같아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노래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일행은 쉼터에서 거제 앞바다가 훤히 바라다 보이는 곳에서 이렇게 주님께서 지으신 만물이 주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순교자와 함께 불렀다. 쉼터 옆에는 순교자 현양탑이 우뚝 서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순교자들이 옥에서 씌워졌던 칼의 모형대로 실제의 크기보다 10배 정도의 크기로 만들어서 세워져 있다. 그 아래 순교자의 유해를 봉안하여 모시고 앞에 검은 오석으로 잘 다듬은 제대가 놓여져 있다. 우리는 잠시 순교자를 생각하며 묵상을 통해 굳은 신심을 주시도록 윤봉문 요셉 순교자에게 전구를 청하였다.

묘지 옆 가장자리의 안내 푯말에는 윤봉문 순교자의 약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경주 인근 영일군 기계면 치동(至洞)에서 윤사우(스타니슬라오, 1827~1883년)와 이 막달레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가족은 1866년 병인박해로 재산을 몰수당한 뒤 양산으로 이주했다가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거제도로 건너와 진목정에 정착했으며 요셉의 부친은 그 이전부터 비밀리에 천주교 신앙을 전하고 다녔다. 거제도로 이주한 뒤에도 진진보(陳進寶, 요한)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입교시켰으며 이런 인연으로 윤봉문 요셉은 장성한 뒤 그의 딸 진순악(아녜스)과 혼인했다.

1887년 겨울, 경상도 담임 로베르(A.P. Robert. 김보록) 신부가 성사를 주기 위해 거제도를 방문하였다. 이때 요셉은 거제 회장으로 임명되어 로베르 신부를 안내하였는데 그해 15명이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했다. 로베르 신부가 거제도를 떠난 이듬해 봄, 통영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했는데 이는 개인적인 탐욕을 채우려고 일으킨 박해였다. 이 박해 때 요셉은 다른 교우 2명과 함께 체포되었지만 혼자만 통영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모진 형벌에도 불구하고 관장이 강요하는 배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통영 관장은 이 사실을 곧바로 대구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감사는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 도적과 같으니, 요셉을 진주로 이송하여 처형하라.’고 명했다. 이에 따라 윤봉문 요셉은 진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십계명(十誡命)과 성교사규(聖敎四規)를 외우면서 신앙을 굳게 증거했다. 그러자 관장은 그를 하옥시킨 뒤 그날 밤 옥리들을 시켜 교살형(絞殺刑)을 집행하도록 했다. 그때가 1888년 2월 22일(양력 4월 1일)로 요셉의 나이 36세였다.

요셉이 순교한 뒤 이 소식을 들은 로베르 신부는 교구장(블랑 주교)에게 보고한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다. 이 말이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위해 흘린 윤 요셉의 피가 거제도에서 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게 합니다. 저는 운 좋게도 이 거룩한 순교자를 친밀하게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가 열심하고 건실하며, 비신자들의 개종에 대한 열의가 가득했던 신자임을 아주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가 저를 도와 섬 지역의 신앙 전파에 힘써 주리라 여겼습니다. 분명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그의 선의에 흡족하시어 그를 제게서 앗아가시는 대신 가장 충실한 벗들에게만 마련하신 월계관을 주시려고 했나 봅니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의 경우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지요. 저희로서는 오로지 신성한 섭리의 숨은 계획에 겸허하게 순종할 뿐입니다.’]

김보록 신부님께서 예언하신대로 윤봉문 요셉 순교자께서는 이번 시복(諡福)대상자로 월계관을 받으실 것이다. 하느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아멘.

 

* 박철수 님은 경산성당 신자로, 관덕정순교기념관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