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결혼식 날짜를 1996년 2월 3일로 정하고, 그에 앞서 12월 2일에 관면혼배를 받게 되었다. 원래는 관면혼배를 받기 전에 두 사람이 함께 가나강좌를 듣고 난 후 신부님과 면담을 해야 하는데, 우리의 경우에는 내가 일본에 살고 있었고 한국말도 잘 못한다는 이유로 남편 혼자서 그 절차를 거쳤다.

우리는 중국에서 만났기 때문에 우리의 공통어는 중국어였다. 하지만 나는 남편 과 사귀게 된 후부터 상해사범대학교에서 아는 언니에게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학을 끝내고 일본에 돌아간 뒤 부터는 교육방송 라디오강좌와 TV강좌로 독학을 했고, 어느 교회에서 하는 재일 교포들을 위한 한글교실에서 간단한 대화도 배우고 있었다. 그래서 관면혼배를 받았을 때 이미 한글을 읽을 수 있어서 신부님께서 물으시는 질문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대답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물론 물으시는 내용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채 종이에 적혀 있는 글을 읽었을 뿐이었지만…. 이렇게 해서 아직 한국에 대해서도, 하느님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 하느님 앞에서 남편과 평생 함께 하기를 맹세했다.
이제 관면혼배도 받았고 본격적인 결혼준비를 해야 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결혼식 풍습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두 나라의 풍습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만 준비하기로 했다. 더구나 내가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 시댁에 들어가서 신혼생활을 하기로 했기 때문에 크게 준비해야 할 것도 없었다.

결혼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신랑, 신부 양가 사이에 혼수문제로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 문제는 일본 또한 마찬가지이다. 각 지역마다, 가정마다 풍습이 다르기 때문에 의견차이가 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동양에서는 아직 결혼이라는 것이 결혼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집안과 집안의 문제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남아 있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이 생기게 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참 편하게 결혼준비를 할 수 있었다. 남편의 주도하에 예식장을 예약하고 웨딩사진을 찍었다. 그 밖에 또 다른 준비를 하느라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결혼식을 앞둔 1월 30일에 나는 대구에서 새 삶을 살기 위해 한국에 입국했다. 그리고 2월 1일에는 우리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 각지에서 친정식구와 친척, 그리고 친한 친구들이 한국을 찾아왔고, 우리는 그들을 마중하기 위해 김해공항으로 갔다. 일본에서 온 15명의 하객 중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 할 신랑, 신부 겸 통역, 그리고 여행객 15명의 가이드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그것도 한국어, 일본어를 바로 통역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어를 거쳐서 통역을 해야 했으니 그 어려움은 두 배로 컸다.

신랑, 신부로서 준비하랴 일본에서 오신 손님들 챙기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였다. 그렇게 정신이 없는 상태였지만 드디어 예식이 시작되었다. 긴장한 표정으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virgin road, 결혼식 바닥에 까는 융단)를 걸어서 남편한테 간 후 둘이서 주례선생님 앞에서 서로 맞절을 했다. 결혼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미리 설명을 들어서 대강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것은 몰라서 눈치껏 남편을 따라 했다. 여담이지만 나중에 결혼식 때 촬영한 비디오를 본 남편이 우리가 서로 맞절을 할 때 내가 남편보다 덜 깊게 절을 했었다고 한 소리했었다.
주례선생님의 말씀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른바 초긴장상태였다. 하지만 “신랑 김대영 군과 신부 이노오끼 아끼 양의…”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만 긴장이 풀려버리고 웃음보가 터질 뻔했다. 응? 이노오끼 아끼? 이나오까 아끼인데, 미리 연습을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너무 긴장하고 있었기에 주례선생님의 그 작은 실수로 인해 웃음이 터져 버렸다.

웃음을 참기 위해 시선을 아래쪽으로 향했지만 어깨가 자꾸 흔들렸다. 참으려고 하니 더 우스워서 2~3번 웃음이 터질 뻔 했지만 겨우겨우 참고 무사히 결혼식을 마쳤다. 결혼식이 끝난 다음에 친구들이 나에게 와서 말했다. “너 아까 시작하자마자 울었지? 고개를 숙이고어깨가 흔들거리길래 고향을 떠나 멀리 시집을 가는 것이 슬퍼서 우는구나 싶어서 우리도 다 눈물을 흘렸잖아!” “???” 아~ 나는 너무 웃겨서 웃음을 참고 있었는데 뒤에서 보는 사람들은 내가 울고 있는 줄 알았구나.어쩐지 남편도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예식이 끝나고도 그 일 때문에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이 일 말고도 나랑 얼굴이 많이 닮은 친언니가 예식이 시작하기 전에 여기저기 다니는 모습을 본 하객들이 언니랑 나를 착각해서 “신부가 예식준비도 안하고 왜 자꾸 돌아다니고 있지?”라는 오해를 하셨고, 한국에 처음 온 친구들이 수성못 근처를 산책하다가 여관 간판에 그려져 있는 온천 마크를 보고 “와~여기는 온천인가보다!”하면서 젊은 아가씨 3명이 여관을 배경으로 웃으면서 사진을 찍고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봤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일본에서 온 가족과 친지를 김해공항에서 다 배웅하고 우리는 바로 ‘한국의 하와이’라 불리는 제주도로 떠났다. 우리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둘다 침대에 쓰러지듯이 잠에 빠져 해가 저물어 갈 무렵에 눈을 떴다. 남편은 그날 미사참례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이 있었다면 하느님께서도 용서해 주시지 않을까? 물론 그 다음 주에 남편은 고해성사를 보았지만….

한국과 일본은 비슷한 부분도 많지만 전혀 다른 부분도 있다. 별 생각없이 한국사회에 뛰어든 나는 신혼여행을 다녀와 시댁에서 시작한 시집살이로 그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렇지, 나의 한국살이는 이제 시작이다!

* 이나오까 아끼 님은 현재 프리랜서로 통역 및 가이드로 활동 중이며, 비산성당에서 8년째 교리교사를 하고 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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