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남짓, 하느님과 나와의 특별한 여행은 어느덧 하루를 남겨두고 있다. 사실 누구보다도 나는 이번 한 달 영성수련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 누구보다도 내 자신이 나의 영적 상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일들을 치르며 바쁘게 사느라 그렇다 할 수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이는 순전히 내 탓이다. 그래서 영성수련을 통해서 내 자신을 직시하고 싶었고 그 헝클어진 모습을 하느님께서 다듬어 주시기를 간절히 원했다. 처음 이 영성수련을 시작하면서 그분께 드렸던 지향은 세 가지였다. 회개, 영적쇄신, 그리고 깊은 휴식!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여행은 시작되었다.
사실 나는 복학하고 나서 지금까지 2년을, 아니 그보다 더한 시간 동안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말씀에 무척이나 소홀했다. 말씀을 듣지만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분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해서였는지 처음부터 굉장히 어색했다. 두려웠다. 내 자신이 너무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날까 두려웠다. 본격적으로 거룩한 독서를 시작할 때 어렴풋이 몇 년 전에 했던 거룩한 독서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참 행복했었는데…. 하루에 세 텍스트들을 가지고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기를 꾸준히 했다. 힘들 때도 있었고 기쁠 때도 있었지만 가장 힘든 것은 말씀 안에서 내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할 때, 즉 예수님께서 내게 아무런 말도 건네시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낄 때였다. 하지만 그동안 그분 말씀에 귀 기울이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니, 너무 죄송스러워서 끝까지 하고자 했다.
며칠이 지나면서 말씀이 힘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말씀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고, 그만큼 부족하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말씀 안에서 잔잔한 음성으로 내게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셨다. 그래서 너무 부끄럽기도 하고 감사했다. 도움 강의를 해주신 신부님께서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고하신 적이 있었다. 거룩한 독서를 할 때마다 언제나 감동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매일 먹는 밥에 늘 감동을 느끼지 못하듯이 말이다. 중요한 것은 감동이 아니라 내게 하시는 말씀의 그 내용이었다. 말씀이 진정 내 영혼의 양식이 되어야 했다. 그 이후로는 말씀을 내 안에 더욱 편하게 모실 수 있었고, 그러면서 사순시기가 왔다.
신학생이라는 이유로 언제나 분심 드는 사순시기, 제대로 보낸 적이 없는 사순시기라 꼭 회개하겠다는 다짐으로 묵상하고 기도했다. 특별한 여행 가운데 사순시기는 예수님께서 정말 함께 하신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결론은 사랑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 내가 이렇게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도 이처럼 나를 사랑하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더 죄송했고 그럴수록 그분께 사랑을 드려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안 들었다. 십자가 위에서 목말라 하시는 예수님의 그 목마름을 나의 작은 사랑으로 풀어드릴 수 있는 그것만이 중요했다. 그리고 부활이 찾아왔고, 나는 부활을 너무나도 기쁘게 만났다.
이번 영성수련 가운데 완전히 새롭게 다가온 두 단어가 있다. 그것은 ‘사랑’과 ‘부활’이다. 하지만 거룩한 독서를 하면서 이 두 단어는 결국 같은 말이라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부활을 사는 것이고, 부활이 곧 사랑의 삶이다. 말씀 안에서 만난 부활이 이토록 생생할 줄은 애초에 몰랐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사랑과 그분을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수록, 부활의 기쁨은 한없이 커졌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결국 나를 향한 사랑으로 시작하여 나를 사랑으로 초대하셨다. 그것이 내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고, 내 안의 흔들리지 않는 바위 위에 새겨졌다.
느낀 점으로 치자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지만 내게 일어난 큰 변화를 ‘하느님을 찾는 나의 눈’이라 생각한다. 이전에는 사람들 가운데 현존하시고, 내게 주어지는 사건들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만을 보기에 급급했다. 나는 그다지도 인간적이었던 것이다. 정작 중요한 ‘말씀’과 ‘성체’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는 시선을 오래 두지 않았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어느 한 곳 계시지 않은 곳이 없지만 나는 그분의 사랑을 가장 극적으로 느낄 수 있는 말씀과 성체를 놓쳤던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허황된 생각에 빠져 성소를 고민하기도 했다. 대체 거룩함에도 또 완덕에로 나아가는 길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되물었다. 결국 나는 내 꼴을 모르고 별을 찾으려 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인 줄도 모르고 무수한 시간을 그렇게 보내왔던 것이다. 다른 곳에서 그분을 찾던 나의 교만은 그분의 사랑 앞에서 고개 숙일 수밖에 없었다. 매일 주어지는 거룩한 말씀의 식탁과 고요한 성체의 식탁에서 나는 조금씩 변화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너무나 부끄럽게도, 사제직에 있어서의 본질이기도 한 소중한 보화에 나는 이제야 눈뜨게 된 것이다. 너무 죄송한 마음에 눈물이 났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기도를 분명히 들어주셨다.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니 회개할 수밖에 없었고, 영적으로 새로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분께서 주시는 힘과 위로는 나를 쉴 수 있게 했고, 그것은 앞으로의 시간에서도 지치지 않을 만큼의 힘과 위로였다.
체험하지 못한 이와 체험한 이의 마음이 이토록 다르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나는 대단한 체험을 하지 못했다. 특별한 체험도 하지 못했다. 단지 하느님의 사랑을 진심으로 체험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니는 힘은 나를 변화시켰다. 나는 너무나도 부족한터라 이 체험과 이 고백이 얼마만큼 내 안에 자리잡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때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생겼다는 것,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을 발견했다는 것이 나를 너무 기쁘게 한다. 나는 너무 오랜 시간을 돌아온 것 같다. 그래서 내 자신에 대해 참 안쓰럽고 실망스럽지만 오히려 그분께는 더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는 말씀과 성체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위해 더 가까이 머물고, 더 많은 시간을 봉헌해 드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없다. 또 넘어지고 또 잊어 버리겠지만 그래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내가 문을 열어 주기를 문 밖에 서서 기다리고 계시는 분임을 항상 기억하며 살아야겠다. 나의 사랑은 그분이 내게 주신 사랑에 비할 수 없이 보잘 것 없지만 그분을 위해서 드릴 수 있다는 데에서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의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많다고 했던가. 내 안에 깊게 파여진 골이 그분의 사랑으로 채워지면서 사랑하고픈 열망으로 가득 차는 듯하다. 이제 다시는 그분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한 달 간 하느님과 함께 한 여행의 끝이 아쉽긴 하지만 이 여행이 결코 끝이 아님을 알기에,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평생 동안 하느님과 함께 걸어 나가야겠다. 함께 해주신 하느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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