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른 아침, 뒷산 산책길을 오르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갑오년 벽두에 날아든 염수정 안드레아 대주교의 추기경 서임 뉴스 덕분이다. “마음이 몹시 무겁고 두렵고 떨린다.”는 염 대주교의 추기경 서임 소감에서 오백여 만 명의 양떼를 지도해야 할 감내하기 힘든 무거운 짐을 떠올렸다.
영광의 면류관이 아니라 고난의 짐을 지게 된 새 추기경님을 위하여 묵주를 잡았다. ‘고통의 신비’로 이어졌다. 고통의 신비 다섯 가지 묵상 주제 가운데 유독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고통 중의 예수님과 마주하였다. 몰매를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피를 흘리시며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다. 당신을 매달아 죽일 십자가형틀을 직접 짐으로 지셨다. 인류를 위한 대속의 제물이 되어야 하셨기에 그것도 기꺼이 지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비록 무겁고 고통스러운 짐이셨지만 우리 인류를 위해 가장 확실하게 짐을 지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께서 완벽한 짐꾼이셨기에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말씀하신다. 또 짐을 진 그들에게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라며 짐 진 자의 소명과 희망을 일러주시고 확신에 이르도록 믿음까지 주신다.
보이고, 만져지고, 무게를 느끼는 것만 짐일까? 분명 아닐 것이다. 육체적 고통을 능가하는 정신적 고통의 짐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어쩌면 우리네 삶 자체가 짐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경쟁으로 재화를 구득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식주는 분명 짐이다. 재산, 건강, 일, 책임, 권리, 의무도 모두 짐이다. 만남과 이별은 물론 사랑과 미움까지도 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 가운데 짐이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정호승 시인은 그의 작품 「나의 등짐」에서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나를 성숙시킨, 나에게 기쁨을 전해준 귀한 선물이었다고 고백한다. 짐이 귀한 선물이라면 피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함에도 굳이 짐을 지지 않으려는 사람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요, 짐이 없는 사람은 살아도 죽은 목숨과 다름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나는 과연 나의 십자가를 잘 지고 있는가? 나의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소명과 희망을 자각하고 또 안식을 느끼고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없다. 세상의 눈으로는 그냥그냥 살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신앙의 눈으로는 전혀 아닌 듯 싶어서다. 예수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짐은 이타의 짐이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짐이라고 여기면서 져온 세상의 짐은 대개가 이기의 짐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자기가 져야 할 짐이 있다. 자기가 져야 할 짐을 어떻게 지고 가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이 달라지리라. 그 짐이 이기의 짐이냐, 이타의 짐이냐이다. 세상엔 선도를 해야 할 지도자가 이기의 짐을 지는가 하면, 필부필부가 이타의 짐인 십자가를 지기도 한다. 이기의 짐을 벗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많을수록 분명 정의롭고, 복되고, 살맛나는 세상이 열리리라. 세상엔 누군가가 십자가를 져야 한다. 그 십자가를 짐으로써 내가 아닌 너를, 너를 넘어 우리를 살리기 때문이다. 산책길 귀로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영광의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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