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아나는 복도 많아.” 성당 교우들은 내가 애처가인 남편과 함께 특별한 걱정없이 산다며 저런 말을 자주 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시샘이라도 하듯 불행은 어느 날 불시에 들이닥쳤다. 남편은 23년간 컴퓨터 모니터와 노트북을 생산하는 회사에 다녔다. 그가 다니던 회사는 한때 주식이 폭등하면서 지속적으로 번창하였다. 그러나 주식은 한순간에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고 결국 파산에 이르렀다. 회사에서 가장 오래 남아 있었던 남편은 다행히 어느 작은 회사에 관리 이사로 바로 취직이 되었다. 그 회사의 사장은 대기업 연구원 출신이며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고 했다. 남편은 사장의 연구력을 신뢰했고 연구 중인 LED 사업이 성공하면 사장과 두 명의 이사가 이익금을 5:3:2로 배분하기로 했기에 남편은 2에 해당하는 돈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혹시 남편이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닌지 염려했지만 그는 무슨 돈이 있어 투자를 하느냐며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전에 다니던 회사의 영업과 무역 관리를 맡았던 남편의 영업력에 해당하는 배분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곧 회사에서 고급 승용차가 제공되어 안심했다. 남편은 의욕에 가득차 바쁘게 회사 일을 도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재정이 엉망인 것을 알게 되었다. 수십 군데에 부채가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사장이 연구하는 사업만 성공하면 어려운 재정은 금방 해결 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예전부터 남편의 월급이 정확히 얼마인지 모르고 살았다. 집안의 경제적인 부분은 그가 다 알아서 잘 꾸려가고 있다고 했기에 당연히 믿었고 각종 공과금도 다 처리했으므로 생활비 외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았다.
새로운 회사로 옮긴 후 아파트 관리비와 전화료, 정수기 사용료가 몇 번 미납되었지만 바빠서 못 냈다고 하기에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러나 남편은 수개월 동안 월급을 한 푼도 받지 못했고, 카드빚을 지고, 아파트를 담보로 몇 천 만원의 융자를 받고, 시댁의 도움을 받는 극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심지어 회사에서 제공했다던 고급 승용차의 할부금까지도 그가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처음 알게 된 2009년 어느 날, 모든 것이 정지된 느낌이었다. 마치 우리가 타고 가던 자동차가 암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난 것 같은 몽롱한 정신이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 그동안 모든 사실을 숨기고 나를 기만한 남편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서 배신감과 불안으로 가슴이 떨렸다. 우리 가정은 길고 긴 캄캄한 터널에 갇혔다. 분노로 숨이 막힌 나는 이혼을 요구했다. 이혼을 하면 분노로부터 해방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러자고 했다. 그러나 먼저 집을 떠나고 싶었다. 우울한 색깔이 드리워져 있는 집은 이미 집이 아니라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싫었다. 사람들 속에서 이방인이 된 것처럼 낯설어졌다. 성당에 갈 때마다 화살기도를 했다. ‘주님, 사람들 앞에 서 있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당신이 저를 부축해 주지 않으면 전 두 발을 딛고 서 있을 수가 없어요. 저를 부축해 주세요.’ 절박함 속에서 쏘아 올린 기도는 언제나 힘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가정의 불행은 도미노 현상처럼 일어났다. 경제 탱크에 기름이 줄줄 새어나가 바닥난 상황에 아들의 음주운전 사고까지 일어났다. 그나마 몸을 다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가스보일러가 터지고 세탁기와 청소기, 가스레인지, 시계까지 모두 고장이 났다. 내 마음도 위장도 고장이 나버렸다. 남편과의 관계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는 어쩔 수 없었던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나를 원망했고 나는 모든 사실을 숨긴 채 집안을 파탄의 지경까지 몰고 간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한 이해는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난 뒤였다.
피정이 그리웠다. 내가 좋아하는 피정만이 분노와 원망, 불안 등으로 막혀 있는 숨통을 뚫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2박 3일 동안 ‘연화리 피정의 집’으로 떠났다. 피정의 집에 들어서자 마자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눈물이 눈가에 빙그르 맺혔다. 그 곳의 순한 공기를 호흡하자 나의 거친 호흡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감사의 기도가 절로 우러나왔다. ‘주님, 저를 이곳에 데려다 주셔서 감사해요.’ 피정 수속을 마치고 배정된 방에 들어갔다. 본당에서 단체로 피정을 할 때는 보통 예닐곱 명 이상 배정 되었던 낯익은 넓은 방 안이 고즈넉한 평화로 가득 차 있었다. 평화가 와락 나를 안아 주었다. 영혼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생경스런 웃음소리, 그것은 고통의 벼랑에서 만난 구원의 웃음소리였다. 피정자는 나 혼자였다. 평소에도 종종 혼자서 지내는 것을 즐겼지만 혼자인 것이 그때처럼 달콤한 적은 없었다. 그날 밤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해병대를 전역하고 체대에 복학한 아들은 냉전 중인 집안 분위기에 힘들어 하더니 짐을 싸서 친구 집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외동아들은 집안이 어려워지자 돈을 좀 더 많이 주는 거친 일자리를 골라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는 걱정하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 거기 괜찮아? 엄마 혼자 있어?” 아들은 난데없이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나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응, 엄만 괜찮아. 별아, 근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왜 울어?” “아니, 아무 일 없어. 친구랑 술 한 잔 하다가 그냥 전화 한 거야. 내 걱정은 마. 엄마 돈 있어? 내가 부쳐 줄게.” “엄마 돈 있어. 걱정 마. 엄만 이곳에 오니까 너무 편해.” 아들은 내가 편하다는 말에 안심하는 것 같았다.
정말 그랬다. 피정의 집에 들어서자 마자 나를 휘감고 있던 불행들은 제 있을 곳이 아니라는 듯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른 아침, 대여섯 분의 수녀님과 함께 성무일도를 할 때는 세상 것을 소유하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자유로운 삶을 지향하는 수도자들의 정결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도서실에서 책을 읽을 땐 마치 고통으로부터 피신한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성모님의 자애로운 미소 같은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주님께선 내가 좋아하는 것을 꼭 챙겨 주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어두운 터널에 갇혀 책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못했는데 수녀원에서 다시 전처럼 책과 다정해질 수 있었다.
수녀원 뒷산을 오르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 느긋한 마음으로 산책을 하며 오랜만에 평화로운 사색의 숲도 걸었다. 수녀원 안에 있는 찻집에 들어가 혼자서 차도 끓여 마셨다. 새벽에는 수녀님께서 손수 운전하시는 봉고차를 타고 왜관 수도원의 전례에도 참석했다. 피정에서의 모든 일상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마치 어렸을 때 과자를 조금씩 아껴 먹던 것처럼, 내게 허락된 3일간의 자유로운 피정이 너무 소중해서 시간을 꽁꽁 묶어두고 싶었다. 그곳에 그대로 정지해 버리고 싶었다. 피정은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위로와 치유의 시간, 거친 숨 고르기의 시간, 위기 속의 만나였다. “그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다.”(탈출 16,31) 아쉬운 마음으로 피정을 마치고 떠나올 때 캄캄한 터널을 비추는 반딧불만한 빛 하나를 마련한 것 같았다. 전처럼 절망 같은 어둠은 아니었다.
집에 돌아오니 남편은 여전히 잠만 자고 있었다. 피정 가기 전에 해놓고 간 음식과 전기밥솥의 밥은 그대로 누렇게 변해 있었다. 소주만 마신 모양이었다. 뒷베란다에는 빈 플라스틱 소주병이 서너 개 뒹굴고 있었다. 그날 거의 한달 만에 남편 곁에 누웠다. 내 몸은 냉담했지만 등을 돌리고 자는 그의 옆구리에 손을 올려놓고 기도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남편을 용서하게 해주세요.’ 마치 주문을 외우듯 같은 기도를 되풀이 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공기는 전과는 다르게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어느 날 설거지를 하다가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주님, 기도가 되지 않네요. 무척 힘드는데 차분히 앉아서 간절히 기도드릴 수가 없네요. 이런 저를 이해해주셔요.’ 그때 말보다 더 큰 울림이 마음속에 들려 왔다. ‘지금 네가 해야 할 기도는 남편과 잘 살아내는 일이다.’ 나는 즉시 ‘예 , 맞아요.’ 하고 받아들였다. 이젠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남편과 잘 살아내는 것, 즉 삶으로써 기도를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삶 한가운데엔 언제든 빠질 수 있는 깊은 구멍이 있었다. 우리가 구멍에 빠진 것은 남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길고도 깊은 구멍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캄캄한 그곳에선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자주 몇 시간씩 걸으며 수없이 삶의 뒤란을 돌아보았다. 그곳엔 그의 수고로 걱정없이 살았던 내가 있었고, 그것을 감사할 줄 모르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교만한 내가 있었다. 주부로서 경제적인 부분을 철저히 외면하고 무책임하게 살아온 내가 있었고, 소통하지 못한 내가 있었다. 그와의 소통이 원활했더라면, 그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일 줄 아는 너그럽고 지혜로운 아내였다면 그가 속마음을 터놓고 나와 상의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위기에 빠진 것은 그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간접적인 나의 잘못도 깊이 배어 있었다. 또한 현실에 밝지 못한 우리의 어리석음도 있었다. 실패는 우리 삶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의 잘못을 나의 회심으로 지워갔다. 그를 향한 분노는 그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변화되어 갔다. 경제적 위기가 부부관계의 위기로 이어질 뻔했지만 우리는 잘 살아내려고 노력했으므로 서서히 결속되어 갔다.
같이 먼 길을 걷거나 자주 등산을 했다. 그가 집을 나서는 아침이면 서로의 이마에 성호경을 그어주고 포옹하며 등을 토닥여 주고 그가 문을 나서면 나는 베란다로 나가 손을 흔들어준다. 아직 대학 한 학기를 남겨 둔 채 임시로 회사를 다니고 있는 아들은 이제 안정된 모습이다. 오로지 성당활동과 전업주부로만 살았던 나는 몇 개월 전부터 유치원 급식실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다. 관리직에만 있었던 남편은 실패후 안정된 직장을 구하기 힘들었지만 2교대 생산직, 아파트 홈오토 AS, 열화상 카메라 영업사원, 식당 주방일 등 가리지 않고 일했다. 잠을 자다가 누군가를 죽여 버리겠다고 이를 갈거나 욕을 하던 그의 잠꼬대는 차츰 없어졌다.
우리는 깨끗이 잊기로 했다. 수개월간의 월급만이라도 받으려고 소송을 걸었었지만 그것도 일찍 포기했다. 상황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상황을 바라보는 마음을 바꾸어 주시며 내가 인내하도록 단련시켜 주셨다. 마음이 바뀌면 상황도 서서히 좋아지리라 생각한다. 주님께선 우리의 모든 것을 쥐고 계시고 어떤 과정을 겪든 행복으로 이끌고 계신다. 그 믿음이 있기에 나는 언제나 성경봉독과 기도를 일상의 우선순위에 두고 산다. 사람들은 더 이상 나에게 복이 많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에서야 나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있으니 마음속에 주님이 계시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 이번 호로 신앙수기공모전 수상작 연재를 모두 마칩니다. 애독해 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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