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온 이후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이 생겼다. 이들에 대한 시복시성 조사는 박해 때부터 시작됐으며,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러한 시복시성의 과정을 몇 단계로 진행돼 왔다. 첫째는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03위가 시성된 과정이고, 둘째는 2014년 시복이 결정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순교자 시복과정이다. 이 외에도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근현대 신앙의 증거자인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의 시복시성을 현재 추진 중에 있다.
1. 시복시성의 추진 이유
하늘나라에는 시복시성을 거치지 않은 많은 복자와 성인들이 무수히 많이 계시다. 이들이 하늘나라에서 누리는 영광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의 시복시성식은 초라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시복시성을 하는 이유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위한 일이다. 시복시성의 이유는 복잡하고 다양한 현재를 살아가는 신자들이 복자와 성인들을 기리며 일상생활에서 거룩한 삶을 살고 나누도록 이끌기 위한 일이다. 시복시성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은총과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며, 복자와 성인들이 하느님 앞에서 사람들을 위해 전구해 주기를 청하기 위한 일이고, 신자들에게 완덕의 모범을 제시해 주어 성화의 길로 나아가게 하려는 일이다.
2. 시복시성과 순교
우리나라에서 시복시성이라고 하면 대부분 순교자를 먼저 생각한다. 순교자를 시복시성 하려 할 때 교회는 그들의 탁월한 신앙과 다른 이에게 모범을 보여준 삶과 정신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단순히 순교했다는 이유로 시복이나 시성이 되기는 어렵다. 순교 자체가 아니라,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하고 증언하는 삶을 중요하게 본다. 신앙의 본질과 전형을 보여주고,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을 증거해 완전한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보여준 순교자들을 시복시성하려는 것이다.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은 단순히 복자나 성인의 숫자를 늘리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가 순교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지극한 은총과 사랑을 발견하고 찬미하며,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고 따르는데 의미가 있다. 시복시성 과정은 순교자에 대한 연구와 홍보를 통해 순교자의 평판과 하느님의 은총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신자들에게 영적 이익을 주려는 행위이며, 순교자들이 피를 흘려 전해준 신앙의 의미와 본질을 새롭게 깨닫고 신앙을 쇄신하려는 행위이고, 우리가 현재 받은 신앙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행위이다.
3. 시복시성의 추진과정
시복시성 과정은 교구 심사, 교황청 시성성 심사, 교황청 교령 발표 순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교구 심사는 관할권을 가진 주교가 공적이고 공식적인 행위로 하는 실질적이고 법적 효력을 갖는 가장 중요한 과정으로 예비 심사라 표현한다. 시복대상자를 선정하여 관할권장인 주교에게 청원하면 주교는 대상자에 대해 조사를 착수한다. 첫째, 대상자가 순교자이면 순교자의 조건을 충족했는지 살펴본다. 참으로 육체적 생명이 죽었는지,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진리에 대한 박해자의 증오 때문에 죽었는지,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지키려고 기꺼이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 평판에 대해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장애가 없는지 조사한다. 순교는 하느님께서 순교자와 함께 계시다는 증거이기에 시복시성의 중요한 사안이다. 둘째, 대상자가 증거자이면 사망 후 최소 5년이 지난 다음 영웅적 덕행과 실천, 성덕의 평판, 성덕의 산물인 기적,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장애가 있는지 없는지 조사한다. 기적은 하느님의 개입으로 발생되는 특별한 현상이요 은총으로, 하느님이 대상자와 함께 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순교자나 증거자에 대한 조사가 끝나면 교구에서는 전문가를 출석시킨 가운데 재판을 열어 증인과 증언에 대해 심문하고 조서를 작성한다. 교구의 모든 심사가 끝나면 주교는 대상자에 대한 공적 경배를 금지시키고, 유해가 있다면 최대한 보존하려고 힘써야 한다. 이렇게 교구 심사가 끝나면 교황청 시성성에 문서를 제출하고, 교황청에서는 심의를 거쳐 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시복에 장애가 없음을 조사한다. 조사가 끝나면 추기경 회의를 열어 시복시성을 결정하고 교황의 재가를 얻어 시복시성을 발표한다. 시복은 통상적으로 시복을 추진한 교구에서 교황청 시성성 장관이 거행하며, 시성은 로마에서 교황이 거행한다.
4. 103위 순교성인의 시성 과정
1838년 말 박해가 시작되자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는 박해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조사를 시작했다.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는 1847년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을 포함한 『증보판 기해일기』를 완성해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냈다. 1847년 최양업 토마스 부제는 이 기록을 라틴어로 번역했고, 이 순교자 행적 번역본이 1847년 10월 15일 교황청 예부성성(현 시성성)에 제출돼 시복 소송절차가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1857년 9월 24일 교황 비오 9세의 윤허를 받은 예부성성은 82명의 순교자를 ‘가경자’로 발표했다. 교황청 위원들은 여러 번의 조사와 검증과정을 거친 후 1905년 7월 26일 예부성성에 기해와 병오박해 시복 조사 내용을 제출했다. 교황청은 1921년부터 1925년까지 관계자 회의를 열었고, 1925년 7월 5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79위 순교자들을 시복했다.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에 대한 조사는 1876년부터 시작됐으며, 1884년 뮈텔 신부는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1890년 제8대 조선교구장인 된 뮈텔 주교는 조사를 본격화 했으며 1895년 르 장드르 신부가 877명 순교자에 대한 『치명일기』를 간행했다. 1899년 6월 19일부터 1900년 11월 30일까지 교구 시복재판을 열어 100명의 증인이 135회에 걸쳐 심문을 받았고, 1921년 2월 12일부터 1926년 3월 18일까지 교황청 시복재판을 열어 85명의 증인이 129회에 걸쳐 심문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과 『병인박해 치명사적』이 정리됐다. 이 자료가 교황청으로 발송됐고, 1952년 3월 2일 교황청의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교황청 시복 관계자 회의를 거쳐 1968년 10월 6일 로마 베드로 성전에서 24위 시복식이 거행됐다.
기해와 병오박해 복자 79위와 병인박해 복자 24위, 총 103위에 대한 시성 안건은 1971년 12월 주교회의에서 거론됐고, 1975년 9월 전국 평신도사도직협의회에서 103위 복자의 시성을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1976년 4월 주교회의 춘계 정기 총회에서 103위 복자의 시성 청원서를 교황청에 제출하고 담당주교에 김남수 안젤로 주교를 선출했다. 1977년 10월 박준영 루도비코 신부를 로마 주재 법정 대리인으로 임명했고, 1978년 4월 13일 103위의 시성 건이 교황청에 정식 접수됐다. 1982년 11월 19일 로마의 추기경 회의에 참석한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천주교회 발생 200주년 기념행사에 교황을 초청했고, 1983년 3월 24일 한국 주교단의 명의로 ‘기적 관면 청원서’를 교황청에 제출했다. 1983년 9월 27일 특별회의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03위의 시성을 승인했고,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시성식이 거행됐다. 이 시성식은 교황이 현지에서 거행한 최초의 시성식이었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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