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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 선교이야기
잊지 못할 첫 영성체 교리


박상용(사도요한)|신부, 볼리비아 선교사목

어느덧 볼리비아라는 나라에 첫 발을 내디딘 지 1년하고 2개월이 지났습니다. 물론 스스로는 말공부 하던 5개월을 빼고 나면 9개월이라고 위로를 하지만, 아무튼 이 만큼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벙어리 신세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도 속으로는 ‘내가 신부인데 못할 일이 무엇이냐? 그냥 부딪혀 보는 거야.’하고 각오를 다집니다.

지금 사는 이곳에서 말공부 마치고 한 달만에 처음으로 주어진 임무는 다름 아닌 첫영성체 담당이었습니다. 본당에 192명, 한국 수녀님들께서 사시는 공소에 90여 명, 시골 공소 3군데 합쳐서 40여 명이 3월 초에 신청했지요. 물론 교리는 현지 교리교사로 임명된 고등학생에서부터 아줌마 선생님들 몫입니다. 2월 한 달 동안 매주 토요일에 모여서 교사 학교가 열렸습니다. 어떤 교구 차원의 준비가 없기 때문에 이 곳 본당에서 자체적으로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프로그램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한 주씩 맡아서 준비키로 하고 일정에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반벙어리라고는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낙동강 오리알이 된 기분 아실런지…. 말도 낯설뿐더러 어떻게 운영되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신부라고 떠억 하고 있으려니 참 그 기분이라니…. 어쨌든지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지만, 같은 조를 이룬 콜롬비아 할매 수녀님을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교사학교가 시작되고 처음 2주는 순순히 잘 지나갔습니다. 셋째 주는 제가 몸담고 있는 조가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할 토요일입니다. 친절하게도 시작하면서 저보고 성서를 읽어 주라고 하십니다. 그까짓 것쯤이야 싶었지만 마음처럼 모든 것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얼마 안 되는 구절을 읽는 데도 얼마나 길던지. 그리고 성서 책 글자는 왜 그리 작아 보이던지. 지금 그때 혼자서 용쓰던 생각하면 참 웃깁니다. 누가 뭐라 하는지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더듬더듬 한 자 한 자, 거꾸로 매달린 국방부 시계가 돌아가듯이 볼리비아 시계도 어김없이 돌아가고 있었던가 봅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담당한 그 날 프로그램 역시 큰 탈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박 신부를 버리지 않으신 하느님 만세!’ 여기까지는 준비 상황.

 

3월부터 시작된 첫영성체 교리 시간은 매주 토요일이었습니다. 준비 기간이 훈련소 생활이었다면 본격적인 교리가 시작된 3월부터는 자대 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담당 신부라고 떡하니 버티고 있으면서 얼굴이라도 매주 내비쳐야 될 것 아닙니까? 큰마음 먹고 첫영성체 어린이들을 향해 대문을 열었습니다. 곧장 앞으로 돌진!

 

본당에 들어서면서 어색하지만 웃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친절하게 먼저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저 사람 누구고?’하는 어린이들의 눈빛. 순간 ‘일곱 군데를 돌면서 인사를 해야 하는 데 다음 주부터 인사하면 늦으려나? 녀석들 좀 웃어 주기라도 하지!’ 그래도 체면이 있지요,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야 없지 않았겠습니까? “한국에서 온 박상용 요한 신부다. 잘 좀 봐도!”하는 식으로 일곱 군데에 인사를 했습니다.

 

다음에 가야 할 곳은 한국 수녀님들께서 사시는 공소였습니다. 그곳은 학생이 좀 작아서 네 곳에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지나간 일곱 곳 보다 앞으로 남은  네 곳에 어떻게 용기를 내야 할지 그 막막함. 그러면서 인사로 던진 말은 겉으로 “너희들하고 함께 지내게 되서 참 기쁘다.” 그 반면 속으로는 ‘인자 우째야 되겠노?’ 그 토요일 얼마나 빨리 돌아오던지…. 이렇게 첫영성체 담당 신부로서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차츰 지나면서 다른 것은 몰라도 매주 얼굴이나 내비치자는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 내 오늘은 꼭 찾아 가리라~♬” 교리가 시작된 지 한 두어 달이 지나면서 그냥 얼굴만 비쭉 내비치기 보다는 좋은 말이라도 한마디 해야지, 하는 용기가 어디서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토요일마다 어린이들을 돌아보면서 단 한마디라도 건네 보자고 생각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용감한 일이었구나 싶습니다.

 

제일 먼저 건넨 말은 기도에 대한 단락에서부터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어느 토요일 본당에 갔더니 기도에 대한 단락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퍼뜩 드는 생각으로 “너거 기도가 뭔지 좀 가르쳐 줄래? 기도가 뭔지 알고 싶은데 잘 모르기 때문에 너거가 가르쳐 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한 명이 일어나서 자신 있게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제가 거기서 물러섰겠습니까? 교재에 있는 대로 설명하기에 꼬리를 물었지요. “너무 어려워서 잘 모르겠는데 좀더 쉽게 설명해 줄래?” 그러자 조용해지면서 일제히 시선이 저에게로 쏠렸습니다. 무슨 말을 할지 잔뜩 호기심에 찬 얼굴로 보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하고 이야기하는 거.”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더 깊이 이야기해 주고 싶었지만, 아직 스페인어가 짧은지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에 그쯤에서 대충 마치고 “가르쳐줘서 고맙다. 덕분에 오늘부터 나도 기도할 수 있겠다.”는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나왔습니다. ‘이렇게 순진하고 귀여운 어린이들과 만나게 해 주신 하느님 만세!’

 

한번은 한국 수녀님들께서 소임하시는 공소 어린이들과 소풍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어린이들은 먼저 출발하고 저는 미사 마치고 점심시간에 맞춰서 가기로 했었습니다. 예정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더니 어린이들은 저를 기다리다가 점심을 먼저 먹은 후였고, 교리교사들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착하면서 저를 향해 달려오는 어린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식사하기 전에 잠시 노는 것을 둘러보고 있는데, 한 명이 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뭔가 싶어서 갔더니 갑자기 자기네들끼리 계획해서 저에게 물을 끼얹는 것이 아닙니까? 속으로 생각했지요, ‘너거들 오늘 나한테 딱 걸렸다. 점심 먹고 보자.’ 점심 식사 후 복수를 시작했습니다. 다 마신 음료수통으로 물총을 만들어서 시작한 기습 공격으로 어린이들과의 물총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음료수통 하나씩 들고 이리저리 쫓아다니면서 지칠 때까지 참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교리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조금씩 제가 해야 할 일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교리교사들의 의견을 들어 가정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는 교리반 어린이들 가정 방문을 생각했습니다. 교리 막바지에 출석하지 않는 어린이들을 포함해서 본당에서는 다섯  가정이, 공소에서는 네 가정이 정해졌습니다. 사실 여기 있는 사람들끼리 이야기하면 한 마디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처지이기는 하지만, ‘올림픽에 1등 하러 나가냐?’하는 말처럼 그냥 방문에 의의를 두고 시작했습니다. ‘신부 하나가 우리 집에 다녀갔었다.’하고 생각만 해도 성공이라고 혼자 생각했습니다.

 

그 방문 결과 부모가 허락하지 않아서, 자기가 원하지 않아서, 부모의 거짓말로 포기한 어린이 세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첫영성체에 이르렀습니다. 그냥 놀기만 한 것은 아니지요? 한번은 기도문도 안 외우고 미사에 와서도 밖에서 놀기 때문에 골칫덩이로 인정된 어린이 집을 한국 수녀님과 방문했었습니다. 집에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만난 꼬맹이는 그 집의 막내였습니다. “아빠 계시냐?”는 질문에 어색한 걸음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아버지를 모셔왔습니다. 방문을 하게 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오고 갔습니다. 그 와중에 저희들을 처음으로 맞이한 꼬맹이 녀석이 자꾸만 우리에게 ‘빠또(Pato, 오리)’를 소개시켜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 집에 오리를 키우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고 소홀히 생각했었는데, 수녀님께서 꼬맹이 손에 끌려 다녀오시더니 저보고도 다녀오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집안으로 저를 끌고 들어가더니 소개시켜 준 그 ‘빠또’는 다름 아닌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5-6 살 정도로 보이는 그 꼬맹이 누나였습니다. ‘왜 하필이면 오리 소개시켜 준다고 했을까?’ 나중에 여기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지만, 어떤 다른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 꼬맹이 녀석 눈에 누나가 흐느적거리는 것이 오리처럼 보여서 그랬을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방문을 마치면서 첫영성체 할 어린이와 수녀님과 보충 수업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물론 부족한 기도문도 외우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땠는지 궁금하시지요? 그렇게 농땡이 치던 녀석이 꼬박꼬박 기도문도 외워오고 약속을 어김없이 지키는 녀석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전혀 기대치 않았던 결과가 나타나기에 속으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어설프게 말하는 신부라고 하더라도 당신의 일을 하시는 하느님 만세!’

 

지난 9월 26일에는 본당에서 드디어 156명 어린이의 첫영성체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유아세례를 하기 때문에 첫영성체는 본당에서 가장 큰 행사 중의 하나입니다. 첫영성체를 하기 위해서 여자 어린이들은 드레스와 신발을 새로 사고 결혼식 하는 신부처럼 단장을 합니다. 남자 어린이들은 넥타이에 흰 와이셔츠를 입고 구두를 신습니다. 156명 어린이가 행렬을 하면 입장하는 모습이나 그 어린이들을 위해 성전이 터져라 모여든 어른들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었습니다. 미사 전에 행렬을 기다리면서 떠들어대는 모습, 카메라를 들이 밀면 어색한 자세를 취하는 모습, 미사 중에 신나서 성가를 부르는 모습,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두 눈을 꼭 감고 기도하는 모습, 첫영성체 후 무엇을 청하는지 진지한 모습, 미사 후 사진 찍을 때 서로 주례 사제 가까이에 서려고 서두르는 모습, 첫영성체 기념 상본 나눠주고 신나하는 모습, 이런 모습들이 이곳 볼리비아의 첫영성체 풍습입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이 첫영성체가 하나의 관습이 되지 말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인 10월 3일 한국 수녀님들께서 소임하시는 공소에서도 84명 어린이의 첫영성체가 있었습니다. 역시나 성전이 미어터질 듯이 사람들이 모여왔습니다.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저 역시 한국에서 느꼈던 것과는 다른 감동을 느꼈습니다. 가뭄에 단비가 내리듯 이곳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용쓰던 생활에 강력한 활력소를 불어 넣는 듯했습니다. 특히 말썽꾸러기라고 가정 방문을 했던 어린이들을 볼 때 그 감동은 어떻게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더 진했습니다. 내년에도 다시 첫영성체를 담당하게 된다면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어쨌든 제가 이곳 볼리비아에서 맡은 소임을 통해서 처음으로 진하게 느낀 감동이었습니다. ‘이 어린이들을 통해 저를 가르치신 하느님 만세!’

 

그런데 걱정이 생겼습니다. 아직 시골 공소 세 곳의 첫영성체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토요일 오후에 무엇을 할까 하는 걱정입니다. 갑자기 생긴 듯한 여유를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벌써부터 심심해지기 시작하는군요. 한편으로는 신부라고 어려워하면서도 친구처럼 지내는 녀석들이 벌써부터 그리워질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