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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 가다 - 마원성지 박상근(마티아) 순교자를 찾아서
“신부님을 혼자 두고 갈 수 없습니다. 신부님과 함께 기쁘게 죽겠습니다.”


박철수(보니파시오)|경산성당

 빠르게 발달된 IT산업에 힘입어 문명의 이기를 실감할 수 있다. 특히나 내비게이션의 안내 멘트를 하는 예쁜 목소리의 아가씨의 말을 잘 들으면 참 편하다.

마원성지는 경북 문경시 문경읍 마원 1리에 소재하고 있다. 문경 읍내에서 20분가량 문경세재 방향으로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백화산 중턱에 못 미쳐 있는데 지금은 박상근(마티아) 순교자 묘소를 가운데 두고 바로 앞 도로는 점촌에서 충주방향으로 산업도로가 잘 만들어져 있고 뒤편 서쪽으로는 중부내륙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져 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도로들이 너무나 잘 되어 있는 것이 가는 길을 서두르지 않아도 좋을 만큼 도로 사정이 나아진 것을 실감할 수 있다.

2월의 마지막 주일 미사를 마치고 본당신자 몇 분과 함께 구미에 볼일이 있어 들렸다가 계획도 없이 마원성지로 향했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을 때는 아침부터 서둘러 서너 시간 걸려서 가야할 길을 구미에서 한 시간 가량 걸려 오후 4시쯤 성지에 도착하였다. 우수가 지난 터라 낮 시간이 좀 길어지긴 했지만 서쪽 벽화산에 서녘 해가 가리워져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하여 괜히 마음이 바빠졌다. 자그마하게 묘지만 조성된 옛 모습과는 달리 현재에는 묘지 앞 아래쪽으로 100여 명의 순례객이 미사나 집회를 할 수 있도록 잔디를 깔아서 정원을 잘 만들어 놓았으며 머리를 숙이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도록 14처 조형물들이 나지막하게 세워져 있다. 묘지 뒤쪽 가운데에는 부활하신 십자가상과 양쪽으로 칼래 신부님과 마티아 순교자의 이별장면을 묘사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주차장에서 묘지로 올라가는 길 왼편에는 500여 년쯤 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붉은 소나무(홍송) 몇 그루가 순교자 묘지를 안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묘지를 지키는 호위 병사처럼 늠름한 자태를 뽐내는 것 같기도 했다.

 “박상근 마티아 순교자”는 문경 토박이로 벼슬은 아전으로 중년에 입교하여 교회 교리를 잘 알고 법을 잘 지키고 어려운 교우들을 많이 돌보아 주고 집안사람들을 입교시키고 외인, 어린 아이들의 임종대세에 힘쓰다가 병인년(1866년) 박해 때 잡혀 상주 진영으로 끌려갔다. 문초를 당할 때 배교를 권유 받았으나 천주님을 배반할 수 없음을 명백히 말하여 치명하였으니 그의 나이 30세요 때는 병인년 12월이라고 경산 모과골 박주헌이 증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경상도 지방 사목을 담당하셨던 칼래 강 신부님의 편지에는 박상근 순교자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쓰셨다.

 

<그의 집에서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그의 목숨이 달려있는 문제였기에 밤 11시경 집을 나섰다. 희미한 어두움 덕분에 길가에 있는 외교인 마을 4~5곳을 무사히 지났으며, 새벽 2시쯤 문경 읍내로 들어와 마티아의 집으로 갔습니다. 마티아와 그의 매형은 양반이 아니라서 조선의 풍습에 따라 그들 집에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저는 행여 누군가가 제 방문을 열지 않을까 두려워 줄곧 방문을 잠궈 두어야 했습니다. 매우 추운 때임에도 군불을 넣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온갖 제약 속에서 둘째 날 밤을 보내던 중 저는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방문을 잠그는 것을 깜박 잊었습니다. 밤 10시경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낯선 사람 하나가 제 방문을 열고는 3~4분 정도 저를 응시하였습니다.

자정 무렵 마티아를 불러 떠나려 하니 봇짐을 챙겨 달라고 말했습니다. “신부님, 어디로 가시려고요? 이곳과 인근 사방 수십 리 안에는 신부님께서 피신할 곳이 없습니다.” 저는 그에게 “이보게,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실 걸세.”라고 말했습니다.

 

첫 닭이 울 무렵 마티아는 황급히 돌아와 포졸이 오늘 중으로 저를 붙잡으러 올 거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한실로 돌아갑시다. 날이 밝기 전에 절반도 못갈 터이니 차라리 산꼭대기로 가로질러 갑시다. 그렇게 돌아가면 길가에 있는 모든 마을들을 피해 갈 수 있고 저녁이면 한실에 도착할 거요”

우리가 문경을 떠난 것은 참 잘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저를 붙잡으러 왔을 때 이미 떠난 뒤였습니다. 동이 틀 무렵 마티아와 저는 숲이 우거진 산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먹을 거라곤 과일(곶감인 듯) 몇 개가 전부였습니다. 우리는 정오쯤 깊은 골짜기에 다다랐고, 산에서 물이 흘러 내려오는 개울가에 앉았습니다. 저의 이마에는 땀이 비 오듯 쏟아졌으며, 둘다 허기와 갈증이 차올랐고 피곤에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습니다.

“자네는 너무 지쳤으니 자네가 알고 있는 이 근처 마을을 찾아가요.” 그러나 마티아는 “신부님, 제가 어찌 초행길인 신부님을 홀로 두고 갈 수 있겠습니까. 신부님께서 피신할 곳이 없을 터인데, 신부님께서 가시는 곳이라면 저도 갈 겁니다. 저는 참으로 기쁘게 신부님과 함께 죽을 겁니다.”

“마티아, 내 말대로 할 것을 명(命)하겠네, 자네가 가져온 마른 과일 절반을 챙기고 나머지 절반은 내게 주게. 그리고 자네 신부(神父)인 내 말을 따르게.” 이 말에 그는 저를 바라보며 울기 시작했고, 저는 고함을 쳤습니다. 사실 제 마음도 비수에 찔린 듯 아팠고, 저 또한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손을 잡고 저희 둘은 함께 울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희를 지켜보고 계셨으며, 모든 것을 당신 뜻대로 마련해 주셨습니다.>

눈물겨운 생이별의 신부님과 신자와의 사이에 있었던 박해시대의 가슴 아픈 장면을 보면 나 자신은 신부님을 위해서 죽음을 함께 할 수 있는지, 이 사순절 기간에 더욱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며 복자로 선포되신 박상근 순교자에게 저의 약한 믿음을 강하게 해 주시도록 전구를 청해본다.

“박상근 마티아 복자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고 저희에게 강한 믿음을 심도록 저희의 기도를 전구해 주소서! 아멘.”

 

* 박철수 님은 경산성당 신자로, 관덕정순교기념관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