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문제없이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드디어 나의 한국살이가 시작되었다. 아담한 한옥집에서 시할머니, 시부모님, 시동생, 그리고 우리…. 합이 여섯 식구의 동거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신혼생활이 시작되자마자 설날이 다가왔다. 일본과 한국의 명절은 조금 다르다. 일본에서는 설날을 양력으로 1월 1일에 쇠고 추석도 양력 8월 15일 전후에 쇤다. 설날 음식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거의 이틀에 걸쳐서 준비를 한 뒤 찬합에 차곡차곡 담아놓지만, 가족을 위해 마련한 음식이라 차례를 지내지는 않는다. 그리고 설날에 친척을 찾아가지도 않고 오로지 식구들끼리만 설날을 보낸다.
1월 1일부터 1월 3일까지가 공휴일이지만 옛날부터 “이 3일간은 부엌에서 일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풍습이 전해오고 있다. 일본에는 예부터 모든 물건에는 신이 있다고 하는 민간신앙이 있는데(부엌의 신, 화장실의 신, 빗자루의 신 등등 800만 가지의 신이 있다고 여긴다.) 특히 설날의 3일간은 그 신들이 집안에서 쉬고 있어서 큰 소리를 내거나 왔다갔다 바쁘게 움직이면 안 되고 부엌에서 불이나 칼을 쓰는 것을 금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쉬는 날 없이 늘 일을 하는 주부들에게 설날만큼은 쉬게 해주자는 하나의 배려였다고 한다. 이제는 그 풍습도 점점 사라져가고 있지만 말이다.
대학교를 졸업한 지 1년이 채 안 되어 시집을 온 나는 당연히 음식을 잘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당시에 나는 간단한 한국어밖에 알아듣지 못하였으니 시댁식구와의 대화는 간단한 문장과 손짓발짓으로만 이루어졌다. 나는 시어머님을 따라하며 나름 열심히 일을 했다. 우리 시댁은 친척이 많지 않았지만 명절 때는 그래도 우리 가족을 포함해 15명 내외의 음식을 하는 것이니 그 음식의 양은 일본에서 온 나에게는 상상을 못할 정도였다. 나는 한국음식이 입에 맞아서 거의 대부분의 음식을 잘 먹는 편이었지만, 명절 음식은 기름으로 튀기고 굽는 것이 많아서 하루 세끼 같은 음식을 먹다보니 싫증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다음 날도 그 음식을 계속 먹는 것이 아닌가! 먹기 싫지만 내가 따로 만들 수도 없고 나만 밖으로 사 먹으러 갈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틀 동안 그 음식들을 꾸역꾸역 먹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어머님께서 냄비를 꺼내시더니 그 여러 가지 전들을 냄비에 넣고 물을 부어서 잡탕을 끓이기 시작하셨다. 그 잡탕은 보기에도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생각에 그때는 정말로 눈물이 찔끔 났다. 실은 시집을 오기 전까지 나는 반찬투정을 해온 편이어서 내가 좋아하는 음식 말고는 전날에 먹던 음식을 다시는 잘 먹지 않았기 때문에 이때만큼 우리 엄마에 대한 고마움을 느낀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베테랑 한국 주부가 된 지금은 명절이 끝난 후 나 자신이 그 잡탕을 끓여 우리 아이들에게 ‘맛있으니까 먹어 보라.’고 권할 정도로 적응이 되었다.
그렇게 대구에서 한국살이를 하는데 하나의 문제가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경상도 사투리. 내가 일본에서 독학할 때 한글교실에 가서 배운 것은 당연히 표준말이었다. 하지만 시할머니, 시부모님께서는 경상도 토박이셨으니 늘 사투리를 쓰셨다. 특히 시할머니 말씀은 일본강점기 때부터 남아 있는, 하지만 약간은 변형된 일본어와 심한 사투리가 섞여 가장 알아듣기 힘들었다. 시어머니는 집에 3대의 여자가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 불편하다는 배려로 내가 시집 올 때쯤부터 본당활동이나 봉사활동, 취미활동을 시작하셔서 집에는 시할머니와 나만 있을 때가 많았다. 게다가 시할머니께서 거동이 조금 불편하셔서 집을 나가시는 일이라고는 지팡이를 짚고 골목 밖에 나가셔서 잠깐 앉아 계시는 것이 전부였다. 오이는 물위, 참외는 위, 부엌은 정지, 간장은 지릉, “개안타!”, “뭐라카노?”, “애 먹었다.” 등등 들어보지 못했던 말들이 꽤나 많았다. 그때마다 남편에게 중국어로 물어보고 하나씩 배워갔다.

또 하나, 문화적 차이 때문에 오해를 하거나 오해를 받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한옥이다 보니 빨래를 밖에서 해야 했는데 내가 밖에서 빨래를 하고 있으면 가끔 시할머니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면서 이것도 좀 빨아 달라는 의미로 빨랫감을 내가 있는 곳으로 던지셨다. 실은 그것이 내가 그 빨랫감을 가지러 왔다갔다 하는 것이 귀찮을까봐 시할머니께서 배려하는 마음으로 무심코 하신 행동이셨는데 나는 그때 너무 서러워서 울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 집에 시할머니께서 살고 계셨기 때문에 찾아오시는 손님이 많았는데 언젠가 한 번 친척 분을 화나게 한 적이 있었다. 제사를 지낸 그 다음 날 음식이 많이 남아 있어서 시할머니께서 친척 분께 식사를 하러 오시라고 전화를 하셨다. 그런데 그 분이 오전에 일찍 오셨기에 나는 ‘연세가 있으니 아침부터 고기 같은 것을 드시겠나!’라는 생각으로 국이랑 나물을 조금만 상에 올려놓고 갖다드렸다. 그때 시할머니께서 고기나 다른 반찬도 있지 않냐며 나를 부르셨다고 했는데 나는 미처 그 말씀을 못 듣고 그냥 나가버린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보통 남의 집을 방문할 때 규칙 아닌 규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남의 집을 방문하는 시간이다. 일단 오전에는 방문을 삼가고 오후에 방문할 경우 대략 오후 2시쯤에서 5시 사이가 적당한 시간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점심시간을 피하고 저녁준비를 하기 전에 나와야 한다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교육을 받는다. 게다가 습도가 높은 일본에서는 음식이 상하기 쉬워서 장아찌 말고는 한국처럼 밑반찬의 종류가 많지 않기 때문에 갑자기 누군가가 찾아와도 밥상에 숟가락만 얹으면 되는 한국과는 사정이 다르다. 그래서 보통 일본에서는 예의상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라는 말을 해도 갑자기 그 사람이 찾아오면 곤란해 한다. 그래서 누군가를 집에 초대할 때는 단단히 음식을 준비한다.

그런 까닭에 내가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사람들이 꼭 식사시간 전에 집에 찾아오시는 것을 처음에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음식을 담는 양도 완전히 다르다. 일본은 원래 각자 작은 상에서 식사를 하기 때문에 반찬도 각자 작은 접시에 보기 좋게 조금씩 담지만 한국은 그릇에 푸짐하게 담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그 날 제사음식을 드시러 오신 친척 분은 화가 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먹을 것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밥이랑 국, 그리고 나물 몇 가지밖에 안 드렸고 그 양도 아주 적었으니 말이다. 친척 분은 “내가 거지도 아니고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냐?”면서 기분이 상해서 나가버리셨다. 그것을 알아챈 시어머니께서 뒤쫓아 가셔서 그 이유를 설명하셨고 차후에 내가 다시 사과 전화를 드렸던 것으로 그 사태는 수습되었다.
또 한 번은 민간치료 때문에 놀란 적이 있었다. 배가 차가워서인지 살살 아팠던 나는 시할머니께서 무엇인가를 주셨는데도 배가 좀 아프다는 것을 손짓으로 전달하며 안 먹었는데 걱정이 된 시할머니께서 밖에서 돌아온 시어머니께 말씀을 하셨다. 그랬더니 시어머니께서는 내가 체한 줄 아시고 방으로 부르시더니 나의 등을 팍팍 두드리고 손가락에 실을 징징 감아 미리 준비한 바늘을 머리카락으로 닦아서 그 바늘로 내 손가락을 푹 찌르시는 게 아닌가!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알 수 없는 두려움마저 느꼈다. 이것도 나중에 퇴근한 남편에게 설명을 듣고서야 그 궁금증이 풀렸다.
이렇게 나에게는 매일 매일이 새로운 경험이었고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든 줄도 모르고 잘 견디어 냈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후 그 당 시에 쓴 일기를 발견해서 다시 읽어 보니 힘들다는 말들이 자주 나오면서 심지어 자주 울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그동안 나 자신도 잊고 있었던 것을 그 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 이나오까 아끼 님은 현재 프리랜서로 통역 및 가이드로 활동 중이며, 비산성당에서 8년째 교리교사를 하고 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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