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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람, 희망을 찾다
성당이 멀게 느껴집니다


김종섭(토마)신부, 소람상담소 소장, 교구 가정담당

참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편지를 써봅니다. 저는 성당 다닌 지 이제 4년 남짓 되었습니다. 아직 믿음도 부족하고 모르는 것이 참 많습니다. 처음 2년은 정말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교리반 수녀님이 바뀌시고, 본당 신부님도 바뀌시고 나니 성당이 뭔가 굉장히 멀게 느껴집니다. 세례 받은 후부터 계속 나가던 레지오마리애 회합도 쉬게 되었고, 지금은 반모임도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성당에 다니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으로 미사는 물론 다양한 본당활동에 꼬박꼬박 참석하며 뭐든지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저보다 훨씬 연세 드신 어른들이, 게다가 신앙심도 깊으신 분들이 물론 기도도 열심히 하시지만 자꾸 신부님과 수녀님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고, 이 신자 저 신자에 대해서도 얘기하는 모습에 갑자기 너무 혼란스러워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혼자 한참을 고민하다가 어떤 분에게 정말 어렵게 이런 마음을 얘기했더니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 그냥 익숙해지면 될 거야.”라고 하시는데…. 저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습니다.

 

음…우선 용기를 내어 편지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먼저 드리는 것은 님(남성이신지 여성이신 몰라 ‘님’이라 표현하겠습니다.)께서 하신 일, 편지를 주신 일이 충분히 ‘고마운’것임을 꼭 알려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한 명의 신앙인으로서 매일이 더 행복하고 즐겁고 자존감이 커지는 경험을 하면 좋겠지만 이렇게 무언가 혼란스럽고 의기소침해지는 경험을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그리고 많이 하게 됩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겠는데 참 ‘고마운 일’을 하신 겁니다.

어떤 과정으로, 어떤 연유로 입교를 하시게 되셨는지는 몰라도 교리 공부하시면서 참 즐거우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울러 친절한 수녀님, 자상한 신부님을 만나셨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경우, 예비신자들께서 경험하는 하나의 ‘애착’ 혹은 ‘각인’ 같은 체험을 하신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각인’은 동물들이 태어나자마자 배우는 행동양식으로 마치 어미처럼 느끼고, 어미를 모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강력한 연대감은 아니지만 우리 사람들 또한 살면서 나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 혹은 사물, 장소, 공간 등등에 대해 무의식적 각인을 갖기도 합니다. 그리고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의 ‘애착형성’을 하게 됩니다. 사실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자아, 자기, 나’를 발견하기보다 ‘너’, 즉 어머니를 먼저 만나게 되고 아이러니하게도 ‘나’에 대한 의식이나 통찰보다는 ‘너’에 대해 우선적으로 맞추는 상황을 맞이합니다. 이것은 ‘너’와 ‘나’를 혼동하는 시기들을 거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의 욕구는 상대방에 따라서, 상대방에 의해서, 상대방을 위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때 이 ‘애착형성’이 잘못 되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의 무의식 안에서, 혹은 기억 속에 저장되었다가 부정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것이 있는데요, 성당에 나오는 것이 재미가 없고 뭔가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허전하고 외롭다는 느낌을 받으신 것이 교리반 수녀님과 전 본당 신부님께서 떠나시고 난 뒤부터가 아니신지요? 곰곰이 한번 떠 올려 보세요. 많은 경우 성당에 처음 나올 때의 그 첫 인상, 그리고 본격적으로 교리공부를 한다든지 미사에 참례를 한다든지 할 때 나를 인도해 준 사람이나 교리반 선생님, 수녀님, 그리고 신부님에 대한 관계 형성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아가 어떤 형태든지 간에 ‘애착형성’으로 진행됩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나 공간, 사람들이 아니라 나에게 소중한 일, 공간, 사람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때 관계를 맺는, 즉 애착을 갖는 경계선을 잘 잡아야 하는데 대다수의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내가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다는 가장 원초적인 감성들이 우리에게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수녀님들이나 신부님들은 세상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시기에 우리들에게 더욱 매력적이고 멋지고 존경스러운 모습으로 와 닿습니다. ‘좋아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고 의지하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애착관계가 해소되거나 사라졌을 때 우리들에게 공허한 마음이나 무엇인가 상실감을 갖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공허와 상실감이 우리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면 이전에는 그냥 보이던 것들이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으로 와 닿기도 합니다. 이것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능 안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하기 위한 방어라고 보시면 됩니다. 따라서 안 좋게 보이는 사람들이나 상황 그 자체를 볼 것이 아니라 먼저 나의 내면을 살펴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제대로 된 ‘홀로서기’를 시작하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그 첫 단추를 끼우는 출발점으로 권해드리는 싶은 것은 바로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자존감’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인사 때 ‘고맙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님께서는 분명히 하느님께 한 걸음 더 다가서는 특별한 체험을 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므로 너무 성급하게도 말고 그렇다고 너무 게으르게도 말고,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하느님을 찾아 떠나는 그 행복한 여정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 속에서 당신은 늘 ‘소(중한 사)람’입니다. 아멘.

 

* 아래 주소로 여러분의 고민을 보내주시면 채택하여 김종섭 신부님께서 지면상담을 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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