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고속전철 테제베(TGV)를 타고 두 시간 정도 내려가면 리옹(Lyon)이라는 고풍스런 도시에 다다르게 된다. 사도 바오로의 제자였던 성 포티누스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와 복음을 전파하고 순교했던 이곳은 프랑스 가톨릭의 본산지라는 명성을 누리고 있다. 사방이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였다는 지형적 특징뿐만 아니라 먹거리나 사람들의 성품도,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에서 대구지역 사람들과 무척 닮아 있다는 느낌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여기 사람들은 자존심도 세고, 마치 대구 시민들이 막창 요리에 열광하는 것처럼, 온갖 종류의 내장 요리와 쌉쌀한 포도주를 함께 즐기는 독특한 음식문화를 자랑한다. 일조량이 많은 탓에 전통적으로 견직물 산업이 발달한 패션의 도시라는 점도, 굳이 말하자면 비슷하다 할 수 있겠다.
1669년 바로 이 유서 깊은 도시에 당대 최고의 음악가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루이 마르샹이 태어났다. 오르간 연주자였던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이미 청소년기에 그 재능을 드러낸 기교파 연주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현란한 손가락의 움직임과 화려한 그의 스타일은 콧대 높은 파리 시민들에게도 먹혀들었으니 20대에 이르러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오늘날 우리들이 아이돌 그룹에 열광하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문헌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가 반주하는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이 성당에서 저 성당으로 몰려 다니는 열성적인 팬들의 무리가 있었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인기는 미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번듯한 스펙을 일구어 놓은 덕분에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행운이 그칠 줄 모르니, 음악가로서는 최고의 자리라 할 수 있는 베르사유 왕실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무시험 등용되는 영광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당시 프랑스의 국왕은 예술과 문화를 치세의 도구로 삼아 절대왕정을 꽃 피웠던 루이 14세. 마르샹은 한순간에 주군의 흠모를 한 몸에 받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그의 삶에 먹 구름이 조금씩 밀려오기 시작한다. 교만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안하무인의 못된 성격이 만인의 입에 오르내릴 지경에 이르렀고, 더군다나 원만하지 못한 가정생활로 부인과 이혼한 후, 하나뿐인 딸자식 양육비도 끊어버리고 모른 척 하는 매정한 처세가 문제시 되었다. 결국 먹고 살 길 막막해진 전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임금님 뵙기를 청하여 하소연하니, 나름대로 자상한 성격의 루이 14세 국왕은 마르샹 봉급의 절반을 위자료로 지급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러던 어느 날 베르사유 궁전의 성당에서 주일미사 도중에 황당한 사건이 벌어진다. 말씀의 전례가 끝난 후, 오르가니스트가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입을 삐죽이며 남긴 말이 가관이다. “내 돈의 절반을 받아간 사람이 와서 나머지 미사를 반주할 테니 알아서들 하시오.”
어전에서 등을 보인 채로 뒤돌아서기만 해도 이른바 괘씸죄로 목이 잘리던 시대에 이런 무례를 범했으니, 제 아무리 임금의 사랑을 받았다 하더라도 용서받지 못할 일! 국외 추방이라는 어명이 떨어져 이웃 나라 독일에서 4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런데 타고난 성격은 바뀌지는 않는 법인가 보다. 조용히 반성의 시간을 가져도 시원찮을 판에 드레스덴의 궁정에서도 거들먹거리면서 귀부인들을 유혹하고, 온갖 오만을 떨다가, 결국은 당시 독일 최고의 음악가 바흐와의 연주 경연을 앞두고는 자신이 없었는지, 슬그머니 도망치는 역사적인 굴욕을 당하게 된다. 일이 잘 풀릴수록 더욱 신중하게 처신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덕목임을 확인 시켜준 웃지 못 할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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