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도착하자마자 한 학년씩 올라가기 때문에 각자 쓰던 방을 비우고 다른 방으로 옮기느라 북새통을 이루었다. 230여 명의 학생이 제각기 다른 방으로 짐을 옮긴다고 상상해보라! 벌써 마지막 학년으로, 신품성사를 받기 때문에 여러 층에 흩어져 있던 우리들은 같은 층으로 모이게 되었다. 방 배정은 항상 부교장이 미리 정해놓았다. 짐이라야 무엇이 있겠는가마는 자질구레한 것들이 의외로 많다. 귀찮을 정도로 손이 가는 것은 책들이다. 책만 정리하고 앞으로 성탄 때까지 신품성사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하고 있었다.
우리는 학교에 가서도 신품 이야기, 밥 먹을 때도 신품 이야기, 산책하면서도 신품 이야기, 만나기만 하면 어디서나 신품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 마지막 학년의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너나 할 것 없이 학교 공부는 건성으로 하는 것 같고 온통 신경은 신품성사 받는 것에만 쓰는 같았다.
유럽에서 비교적 가까운 그리스, 레바논, 이란, 이라크, 이집트 같은 곳에서는 아들이 신품 받는다고 그 가족들이 직접 로마까지 오겠다는 편지를 보내왔다고 야단들이다. 물론 미국 친구도, 오스트레일리아 친구들도 식구 전부가 온다고 들떠 있었다. 하지만 아프리카, 동남아, 중국, 일본 사람들 그리고 한국 사람인 나는 아예 신품 때 집에서 누가 오리라는 생각은 안 하는 것이 옳지. 왜 생각을 안 해봤겠는가마는 그런 생각 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지. 아마 독자 여러분들 중에서는 한국이나 중국 혹은 일본 같은 곳에서는 왜 아무도 안 갔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도 없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구태여 한 말씀드린다면 ‘우리는 그때 가난했었다.’ 그 시절에 ‘외국 여행’이란 단어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낱말이 아니었던가.
누가 자기 아들 신품 받는데 참례하고 싶지 않은 부모가 있겠는가. 미국이나 캐나다 혹은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나라는 부자가 아닌가. 천 달러, 이천 달러 같으면 큰 돈도 아니지. 그 당시의 한국 상황이 현재와 같았더라면 왜 우리 부모라고 로마에 못 갔겠는가. 그러나 그때 우리 형편으로 그 돈은 엄청난 금액인 데다, 어떻게 그 엄청난 돈을 들여서 구라파 여행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한국, 일본이 그러했다면 동남아는 물론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는 아직 독립도 되기 전 식민지 상태에서 억압 받고 있을 때였다. 우리나라도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1950년대의 이야기가 아닌가. 그 시절 한국의 국민소득이 고작 65달러밖에 안 되었다고 들었다. 참으로 어려울 때였다. 유학은 왔지만 집에서는 물론 말할 것도 없지만, 교구에서조차 단돈 10원 한 장 용돈하라고 보내주지 못했을 때였다. 보내주지 못하는 분들의 마음인들 오죽했으랴!
우리는 그런 시절에 살았다. 한국이 가난했으니 한국 사람은 어디 가서나 가난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유학 갔다가 방학 때면 집에 다녀오고, 누나 시집간다고 다녀가고 하는 시절이 아닌가. 지금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12,000달러가 넘었다면 그때 시절에 비해 통계적으로는 2,000배나 더 잘 살고 있는 것이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게 한다.
세월은 흘러흘러 못 먹고 못 살았던 그 시절은 아무도 기억하는 이 없고 오늘의 번영이 마치 노력도 없이 태고적부터 있어온 풍요인 양 오늘의 번영을 즐기기만 하는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의 부모의 부모들이 피와 땀으로 이룩한 이 땅의 기적을 왜 알려고 하지 않는가. 그때 그분들은 미국이 잉여농산물이라고 무상으로 갖다 주는 밀가루와 강냉이 가루로 연명해왔고 몸에 맞지도 않는 구제품으로 알몸을 감추고 일터에서 뼈가 빠지도록 일해 왔다. 그러면서 번영의 발판을 삼아 오늘의 한국을 만들어 낸 것이다. 행여나 독자 여러분은 ‘아이들한테 그런 소리 해 봐야 무슨 관심이나 갖겠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절을 겪고 목격하고 살아온 우리 늙은이들이 바른 소리 해주지 않으면 어느 천 년에 누가 진실을 말해 준단 말인가! 요사이 보니 너무나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자기들만 옳다고 날뛰는 젊은이들이 많아서 좀 생각하며 살라고 충언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모든 학생들에게 모든 것을 똑같이 배려하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생활에 티끌만한 차이도 느낄 수 없었다. 날이면 날마다 미사 연습 하느라 성당 2층은 붐볐다. 그러던 어느 날, 부교장이 부르신다기에 갔더니, 엄청 큰 보따리를 주시면서 안에 편지가 들어있으니 가져가 보라는 것이다. 보따리 속의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곧 신품 받을 사랑하는 부제님, 우리는 당신이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당신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승품(昇品)되실 분이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교회에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목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회에서는 매년 한 분의 사제를 위해 승품(昇品) 때와 첫 미사 때 필요한 물질적인 모든 것을 선물합니다. 금년에는 부제님이 선정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첫 미사 때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 빅또리오 베네또 교구 젤라뜨리치회 드림.”
정성들여 싸고 또 싼 것을 하나하나 풀어보니 온갖 것이 다 들어있다. 신품 받을 때와 첫 미사 때 사용하라고 성작은 물론 제의, 장백의, 띠, 주수 수건, 와이셔츠는 물론 팬티, 양말, 손수건 한 장까지 꼼꼼히 챙겨 넣었다. 수단과 양복은 맞춰 입을 천과 수공료와 구두 살 돈까지 들어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교구에서는 매년 새 사제를 위해 서품 때와 첫 미사 때 사용할 모든 것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 한다. 내가 서품 받을 때 처음으로 외국 사람을 선정했는데 전쟁 중에 고통 받고 있는 한국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이 세계에 알려진 것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일어났고, 그것 때문에 한국이 많이 알려진 것은 사실이다.
빅또리오 베네또 교구는 북 이탈리아의 산간지역으로 베니스에서 기차로 약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다. 내가 신품 받을 때 교구장 주교님이 후에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이 되신 분이다. 신품성사를 받고 먼저 교구장 주교님과 젤라뜨리치 회원들에게 인사하러 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생각지도 않았던 선물을 받고 보니 흐뭇하긴 했지만, 행여나 옆의 다른 나라 형제가 나보다 갖춘 것이 모자라지나 않나 하고 둘러봤지만 나보다 못한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성작과 제의 등이 준비되었으니 신품 때까지 준비할 것이라곤 별로 없다. 초대장, 기념상본 인쇄해서 보내기, 지금까지 기도해주시고 도와주신 은인들에게 인사편지 쓰기 등이었다. 하지만 가슴 속에 허전한 느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때로 그럴 때면 으레 어머니 생각을 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 있었다. 눈을 감으면 어머니는 때로 언짢으신 표정으로 나를 꾸짖으실 때가 있는가 하면 또 “지금 네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데, 지금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고 되물으실 때도 있다. 아주 근본적인 물음으로 나를 당황하게 할 때도 있다. “너는 왜 신부가 되려는가?” 하고. 그럴 때면 나는 모든 생각을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된다.
어릴 때 한티에서는 나무와 바위, 하늘과 산들, 새 소리 바람 소리 사이에서 개구리와 다람쥐들이 나의 친구였고 흰 구름 푸른 하늘을 지붕 삼아 뛰놀던 풀밭이 나의 집이었다. 나비와 잠자리들이 우리들의 장난감이었다. 거기에는 언제나 그들이 있었고 우리는 하나였다. 그렇게 다섯 살까지 살다가 한티와는 너무나 환경이 다른 만주 벌판에 가서 살게 되었다. 그곳은 보이는 것이 지평선이고 광활한 초원에 푸른 하늘밖에 없는 곳이었다. 동네 뒤에는 강이 있었기 때문에 여름이면 물장구를 치고 미역을 감고, 추석이 지나고 9월 중순부터는 눈이 오고 얼음이 얼기 시작하기 때문에 바로 그 강에서 얼음지치기도 했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송판에 철사를 두 줄로 박아서 얼음을 지쳤지만, 나에게는 아버지께서 하얼빈에서 사 오신 정식 스케이트가 있었다. 가죽 구두에 붙은 스케이트 날을 보고 동네 아이들이 얼마나 부러워했던지!
12월도 중순에 접어들어 신품 준비 피정이 시작되었다. 그때 정리해 둔 노트를 들고 이 글을 쓴다. 내가 나에게 묻는 말로 시작한다. ‘너는 무엇 때문에 사제가 되려고 하는가? 왜 사제가 되려고 하는가?(이 말은 어머니께서 살아계실 때 ‘네가 신부가 되려면 신부가 왜 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된다.’는 말씀을 떠올리게 하였다.) 사제는 봉사자이고 그리스도의 도구인 동시에 또한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중계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과연 너는 사제가 되어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어떻게 잘 연결할 것인가? 사제는 성사적인 존재이다. 성사란 보이는 물질로 하느님의 은총을 전달하는 것이다.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리하고 교회를 대신해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너는 하느님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가교 역할을 해야 한다.’ 피정 때 이런 것을 중점으로 묵상했었다. 지금도 그때 묵상한 내용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또 신부나 수도자에게 말할 때, 그 내용을 근본으로 삼는다.
당시 피정 노트에는 이런 제목도 적혀 있다.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행위.’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행위는 그리스도를 내 안에서 내쫓는 행위이다. 어떻게 인간의 마음에서 그리스도를 내쫓을 수 있을까? 그것은 신부가 세속적으로 마음이 기울어질 때, 그리스도는 마음에서 쫓겨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제는 언제나 그리스도적인 생활, 그리스도를 닮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 이외 인간적인 덕을 쌓아야 하는데, 특히 겸손하고 남을 용서하는 너그러움과 진심으로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남을 도울 때에는 진심으로 도우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내 이름과 내 공덕은 추호도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올바른 사제의 생활이다. 이렇게 피정 지도 신부는 우리가 사제가 된 후에 잘 살도록 도와주셨다.
1957년 12월 21일, 그날은 아침부터 흐리고 날씨가 화창하지 못해 은근히 오늘 신품 받는 날인데 비가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아침 기도 시간에 피정 지도 신부는 “이제 여러분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다 했습니다. 지금부터는 각자가 하느님과 대화하며 신품에 임하십시오.”하고 묵상하도록 권했다.
이윽고 9시 정각, 우리는 행렬하여 성당에 들어갔다. 성당은 신학생들과 신자들로 입추의 여지없이 꽉 찼고, 성가대에서는 우렁찬 합창으로 미사 시작을 알렸다. 인류 복음화 성성 부성장이신 삐에뜨로 시지스몬디 대주교님의 주례로 미사가 시작되었다. 경문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칠 새라 대주교님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이제 정말 하느님께 나 자신을 바치는구나.’하는 생각과 내가 그렇게도 신부되기를 염원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머니는 천당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리라는 것을 느꼈다.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새로 신품 받을 우리에게 교회가 거는 희망이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성인 호칭 기도를 바칠 때 제대 앞에 부복하여 묵상에 잠겼을 때에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 지 몰랐다. 너무나 가슴 벅찬 순간이었고, 너무나 오래 기다리던 바람이었기에 아무 감각도 없이 그냥 몸 전체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성인 호칭 기도가 진행되는 동안 한국에서 아버지와 누님들, 동생들, 그 외 나를 아끼는 많은 분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도 느껴졌다. 다음 미사가 진행되면서 대주교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안수하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우리는 신부가 된 것이다. 그때부터 제대에 대주교님과 함께 서서 미사를 계속 봉헌했다. 성체 축성의 기도문을 같이 바칠 때에는 우리의 발음이 과연 제대로 나오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떨렸다. 미사 중 계속해서 ‘아, 나는 신부다.’라는 생각과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 당신이 그토록 원하던 신부가 되었습니다.’하는 생각을 했다. 미사가 끝나고 행렬하여 축하식이 준비되어 있는 강당으로 들어갈 때 새 신부들 얼굴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만족스런 웃음이 가득 차 있었다. 서로서로의 시선이 마주칠 때, 우리는 말없이 웃고 있었다. 축하식은 대주교님을 위시해서 원장신부님의 간단한 축하의 말로 끝나고, 식사를 하러 갔다. 그날 우리는 가는 곳마다 축하 인사를 받았고 식사 후 몇 안 되는 한국 교민들과 유학생, 대사관 직원들과 모여 인사를 했다.
저녁이 되어서야 내일 아침, 첫 미사 지낼 걱정을 해야 했다. 내가 첫 미사를 지낼 곳은 바오로딸 수도회 본부 성당이었다. 그 수녀원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본부 원장 수녀는 그 수도회를 창설할 당시 첫 회원으로서 아직 살아계시던 분이었고 그 원장 수녀와 장시간 수도생활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감명 받은 이유 때문에 그곳에서 첫 미사를 지내겠다고 이야기했었고, 그 원장 수녀는 흔쾌히 한국에 진출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한국에 와서 큰 일을 하고 있는 바오로딸 수도회의 수녀들을 보면 아직도 그 때 생각이 나곤 한다.
12월 22일 오전 9시, 안또니노 삐오 9번지(Via Antonino Pio 9 Roma)에서 첫 미사를 바쳤다. 내가 첫 미사를 드린 성당의 주소를 지금도 기억하는 이유는 그 곳이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수백 명의 수녀님들이 나를 위해 합창해주셨고 잔치를 베풀어주셨다. 아직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날 수녀원에서나 학교로 돌아와서 서로가 첫 미사를 지냈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신품을 받고 난 다음 우리의 생활은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선 매일 미사를 지내야 하고 학생 때와는 달리 더 깊은 묵상과 영적 독서에 충실하기 위해 학과 이외에도 많은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말로 신학석사 시험이 있기 때문에 또 바쁜 생활이 시작되었다. -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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